[Review] 아름다움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고민하다 -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2"

우리에겐 단지 연극 ‘속’ 웃픈 이야기로 다가올 뿐.
글 입력 2019.08.06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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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극이 끝나고, 붕 떴던 대화


 

“연극 재밌다.”

“맞아. 배우님들 연기 진짜 맛깔나게 잘 하시더라.”

“두 분 밖에 출연을 안 하신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서사를 잘 이끌고 가셨지.”

“진짜 좋았어. 배고프다. 국수 먹으러 가자. 걸어서 10분이면 혜화역까지 가더라.”


*

  

연극이 끝나고 친구와 가장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우리는 연극 자체만을 두고 ‘좋은 연극이었다고’ 평했을 뿐 연극의 자세한 플롯까지 언급하진 않았다. 연극과 관련된 이야기는 저게 끝이었다. 곧이어 대화의 주제는 저녁식사로 넘어갔다. 국수를 먹자, 혜화 연극로 근처에 맛있는 국수집이 있다더라. 혜화역 쪽으로 걸어가면서, 연극을 보기 두 시간 전에 함께 관람했던 영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영화 진짜 별로지 않았냐, 감독이 이제 감을 잃은 게 틀림없다—등. 참 시시한 이야깃거리로 가득한 대화였다.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과연 연극에서 다루는 문제의식에 대해, 우리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던 걸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둘 다 그저 묵히고, 숨겼던 게 아닐까. 불편하고 메스꺼운 감정들이 올라왔을 텐데도. 어쩌면 나의 쓸데없는 추측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 친구는 정말 연극을 보고 재밌고 좋았다는 생각만 했을 수 있는 거다.


내가 내 속에서 올라왔던 메스꺼움을 애써 묵히다가, 어느 순간 답답해져서 망상으로 분출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 리뷰는 나의 메스꺼움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메스꺼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속으로 삼킨 생각들은 무엇일까. 친구와 나는 왜 연극을 관람한 후에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을까.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우리가 ‘연극’을 보았다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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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쨌든 연극은 현실이 아니었어.


 

우리는 연극을 봤다. 주제는 최근에 가장 문제시되고 있는 코르셋 문제. 획일적인 미의 기준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당장 각종 포털사이트의 ‘뷰티(Beauty)’ 탭만 클릭해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 이러한 내용을 녹여내는 작품들의 경우,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대체로 명확하다.


어떤 틀을 만들어 아름다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절대적인 미 기준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개인의 가치는 외모라는 단편적인 척도로 평가할 수 없다, 등.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들에 충분히 동의한다. 당연히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무례하고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사회 전반에 ‘대체로’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얼굴상이 있는 건 사실이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하진 않아도, 아름다움을 선호한다는 보편적인 분위기는 존재한다. 기원전부터 미남과 미녀 등의 아름다운 사람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해 왔다.


시대가 변하면서 미의 기준도 당연히 변화했지만, 어쨌건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말들은 여태껏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라는 틀 안에 갇혀서 사람을 멋대로 평가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지만, 성질이나 쓰임새가 동일한 두 가지 중에서 보다 예쁘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택하는 본능까지 비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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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다. 특정한 이념이나 사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더 아름답고 예쁠수록 좋다고. 아니, 적어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다. 같은 두 개가 있어도 좀 더 모양이 예쁘고 정갈한 걸 가져가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나의 외면과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연극이 다루는 주제의식들에 공감하면서도, 연극 바깥으로 연극 속의 이야기를 끌어와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연극은 당장의 내가 직면할 현실은 아닌 것이다.

    


“그래, 외모 가지고 제멋대로 평가하면 안 돼. 코르셋 문제 심각하지, 정상체중인데도 살을 더 빼야 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화장품을 찾아봐야 하고. 그렇지만 꾸미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잖아? 외모뿐만 아니라 무엇이 됐든 그 정도가 심각하면 ‘연극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될 수 있는 거지.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은 작품이었어. 아, 새 옷이랑 새 신발 사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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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름다움의 재정의 : 보편성과 절대성 구별하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글이다. 지금까지 쓴 내용만 보면, 단지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는 무책임한 인간의 발언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아니다. 나는 분명히 작품에서 제기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메시지들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극심한 외모지상주의로부터 초래된 코르셋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외모라는 잣대로 타인을 품평하고 부정적인 틀 안에 묶어두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렇지만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성이, 아름다움 자체를 제거하려는 차원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안 될뿐더러, 인류의 지난 역사를 회고해보았을 때 불가능하다. 난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예쁜 옷과 악세사리를 열심히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있으며, 상대방이 내 기준에 부합하는 외면이나 내면을 갖춘 경우 그 사람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분야에서든 각자의 취향이 있고, 그 취향으로부터 개개인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도출된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아름답다는 말을 쓰는 나의 기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없다. 나의 주관을 반영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이때 나의 주관이 오로지 나만의 생각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외부의 환경적인 조건들로부터 받은 영향들도, 주관의 일부로 편입될 수 있다. 그래도 명백한 것은,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로 구성된 나의 주관이 지시하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거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 방향은 절대적인 차원에서 미를 확립하려는 시도를 무너뜨리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때 주의할 점은, 절대성과 보편성을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쌍꺼풀이 짙고 큰 눈, 서구적인 얼굴형, 높은 코와 갸름한 얼굴형. 이러한 요소를 지닌 사람의 얼굴이 ‘대부분의 경우’ 아름답다는 평을 듣고, 그로부터 그 사회의 보편적인 미인상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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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으나, 그러한 미인상만을 절대적으로 옳은, 모두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움으로 규정하면 문제가 된다. 보편적인 미인상이 만들어질 순 있어도 그것이 절대적인 미인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시도들이 작금의 코르셋, 외모지상주의를 초래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르셋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고, 자신이 규정하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른 채 코르셋에 끌려가느라 고통 받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더 큰 문제점은, 코르셋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향된 미의 기준이 아니라 보편의 합의를 깨뜨리려고 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제나 주류에 해당하는 기준이 만들어지는 건 막을 수 없다. 우리가 막아야 하는 건 보편의 합의를 절대적인 합의로 확장시키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적인 아름다움을 인정해야 한다. 보편이 동의하는 아름다움과 별개로, 개개인에 따라 도출되는 다양한 미의 기준들이 있다는 것. 보편적인 미 기준을 따르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태도. 아름다움의 재정의는 보편의 합의를 바탕으로, 그 위에 개개인의 상대성을 하나하나씩 얹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나의 메스꺼움도, 미 자체를 부정해야 할지 모른다는 강박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획일적인 방향으로 미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따른다면 그것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자꾸만 미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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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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