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를 잊은 그대에게 [문화 전반]

내가 시를 읽는 방법
글 입력 2019.08.05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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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대학 1학년 1학기 때 시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진 이후로 시를 제대로 읽어 본적이 언제인가 싶다. 이렇게 시를 잊은 나날을 보내고 있던 와중이었다. 얼마 전 컴퓨터를 뒤지다가 고등학교 때 작성했던 글들을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시를 좋아하던 친구들과 서로의 시를 나누고 그에 대한 평을 써주던 시절의 글들이었다. 한 줄, 한 줄 읽다보니 그 시절이 떠오르더라. 친구들의 시와 내 평들을 나누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첫 번째 시부터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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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



1. 기억과 천재



<천재>


김광수


어릴적 선잠 속에서 마법사와 계약을 했습니다.

기억력이 무한해지는 대신에 시간이 흐르며 자음들을 까먹을거라고....

ㄱ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이 ㄱ나지 않습니다.

기억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은 모두 제 기억력을 탐냈죠.

누구나 바라지만, 저는 겁만 나네요.

기억의 서랍장은 이미 촘촘한 ㄱ의 얇은 파일들로...... 다시는 열어보지 않겠다는 약속들 때문일까요?

약속... 저는 기억이 ㄱ나지않습니다.

약속.....야속... 야속한 약속.

겁이 납니다.

겁...겁...업...겁은 곧 업... 나의 카르마...겁보의 업보..

다음은 나를 잃어버릴까 두려워요

ㄴ 차례겠죠?

나를 잃어버릴까. 나의 카르마. ㅏ의 카르마.. 야속하..ㄴ 약속.


출처: 김광수 페이스북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의 묘사에 따르면 푸네스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세잔의 포도주 잔을 보는 것만으로 ‘포도주로 변한 모든 포도알맹이들, 포도밭에 있었던 모든 포도덩굴과 모든 포도 줄기의 수’들을 지각할 수 있으며, 정확하게 ‘1882년 4월 30일 새벽, 남쪽 하늘에 떠 있던 모든 구름들의 형태’를 기억해낼 수 있는 소년이다. 심지어 그 기억은 단순히 시각적 이미지에만 머물지 않고 근육의 감각, 체온의 느낌들마저 포함하고 있다. 그의 이런 완벽한 기억능력은 그의 이런 발언에 의해서 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나, 홀로이며 독자적인 나는 세상이 시작된 후의 모든 인류가 가졌던 기억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요.”

푸네스는 ‘모든 것’을 ‘완전’히 기억하기에 그에게는 모든 개체의 인상과 느낌 그리고 특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한다. 그렇지만 그 뿐, 그에게는 기억들을 종합하고 일반화하고 추상화 하는 과정을 거쳐 표현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3시 14분에 정면에서 본 강아지’와 ‘3시 15분에 옆에서 본 강아지’가 같은 강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의 기억 속에서 두 강아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인 것이다. 즉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플라톤적인 사고를 할 능력’이 없었으며 ‘강아지라는 상징이 형태와 크기가 상이한 서로 다른 개체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차이점뿐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푸네스 또한 그래서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고 쏟아지는 정보와 기억들 속에서 일찍 삶을 마무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푸네스의 인식과 기억방법은 우리가 평소에 너무도 쉽게 하나의 개념 아래로 묶어버렸던 개체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나무라는 단어 하나에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고 경험하게 되는 수 많은 나무들을 결부시킨다. 당장 집 앞 놀이터에 심어져있는 가로수나 학교 운동장에 서 있는 커다란 고목이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체의 차이점들은 무시된 채, 그저 ‘나무’라는 단어하나로 개념화되어 버린다. 이 과정에서 개체들의 개성은 모두 일말의 고려도 없이 거세되고 우리의 사고 속에 남는 것은 실존하는 각 나무들의 개체가 아니라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여러해살이 식물’이라는 개념이다. 사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인간사고의 추상화, 일반화, 개념화 과정이다. 너무 당연하기에 우리는 이 과정에서 행해지는 폭력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감각해왔다. 우리는 푸네스의 완전기억능력을 통해서야 드디어 개체들의 차이점에 대해서 감각하고 즐길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시를 한번 살펴보자. 시인의 시에서도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 등장하는 능력과 비슷한 종류의 능력이 등장한다. 바로 첫 행의 화자의 진술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기억력이 무한해지는 대신에 시간이 흐르며 자음들을 까먹을거라고... ”

푸네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화자는 무한한 기억력을 지니게 되지만 그중 유독 자음만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굳이 시인이 이곳에서 ‘자음’을 언급한 것은 시의 뒤에서 계속해서 이어질 언어유희를 위한 포석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자음’은 언어와 개념에 관한 환유라고 생각한다.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되는 문자들이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들을 가지고 인간은 사유하고 생각한다. 개념을 만들고 개체들을 포섭한다. 그래서 화자는 모든 것을 기억하기에 (완전기억능력) ‘자음’을 즉, 개체들의 개성을 거세하는 거대한 일반화의 과정에 대해 까먹게(저항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저항의 일부로 화자는 기호들의 기표와 기의를 마음껏 분리하여 뒤섞는 유희를 시작한다.

‘ㄱ’[발음:기역]과 기억[발음:기억]의 소리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화자는 먼저 말한다. “ㄱ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 문장 까지는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순히 ‘ㄱ’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진술이다. 다음 문장은 좀 더 난해하다.

“기억이 ㄱ나지 않습니다.”

뭐지? 라는 소리가 나온다. 기억이 ‘ㄱ’나지 않는다고? 기억과 ‘ㄱ’이 가지는 기표(소리)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그 순서를 뒤섞었다. 그런데 각 기표들이 지니고 있는 기의(의미)들은 뒤바뀐 순서를 따라가지 않는다. 의미는 그대로 둔 채로 기표들을 떼어 내어 둘을 뒤바꾸어 버린 것이다. 다음 문장은 더 가관이다.

“기억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 무슨 자기 모순적 소리인가. 기억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문장채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이미 시인은 위에서 언어를 자기 마음대로 의미와 소리단위로 분리하여 뒤섞어버린 개구쟁이 라는 것이다. 과연 저 ‘기억’이라는 기표는 ‘ㄱ’의 의미를 가진 기표일까 아니면 ‘기억’의 의미를 가진 기표일까? ‘기억나다’라는 동사로 쓰인 ‘기억’이라는 기표는 과연 ‘ㄱ’의 의미일까 ‘기억’의 의미일까? 꼭 기억과 ㄱ만이 선택지 일까? ‘기억’이라는 기표를 시인이 마음대로 ‘개’라는 의미를 지니게 해버리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순간 이 상징체계를 ‘언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시인은 이렇게 단 세 줄의 진술로 우리가 굳게 딛고 있었던 언어와 개념의 지평을 산산이 조각내버린다.

각 개체들의 실존을 다시금 인식의 영역으로 끌어오기 위해 시인은 언어를 조각내고 개념을 부숴가며 일반화와 추상화의 과정을 거부한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는 기억 혹은 선지식이라고 불리는 개념이 없이는 각 개체들을 처리하지 못한다. 완벽한 기억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잎이 무엇이고 줄기가 무엇이며 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나무라는 개체에 대한 온전한 경험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해도 그 경험 또한 잎의 개념에, 줄기의 개념에 뿌리의 개념 속에 갇혀버릴 것이다. 즉 이 저항의 끝은 이미 실패로 내정되어 있다. 개체성을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기에 ‘야속한’ ‘약속’이 되어버린다. ‘나’라는 개체 또한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전체성 앞에서 언젠가 삼켜질 것이다. ‘다음은 나를 잃어버릴까 두려워요.’ 시는 화자의 목소리가 마치 암흑에 삼켜지듯이 끝맺는다. ‘나의 카르마. ㅏ의 카르마.. 야속하..ㄴ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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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ce, 에피다우로스.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고대 그리스의 원형극장이다.




2. 스러져가는 존재들을 위한 노래



시는 체험이다. 그래서 좋은 시는 폭력적이다. 첫 행부터 망막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포근하고 아늑한 일상 속에서 자던 나를 거칠게 흔들어 깨운다. 그러고선 거칠게 손을 잡아 끌어 시 행 사이로 나를 던져 넣곤 한다. 그렇게 시인이 안배해 놓은 언어들 사이로 사정없이 부딪히며 자유낙하 하다보면 시의 끝에서는 온 몸에 안 아픈 구석이 없다. 그래서 좋은 시를 읽으면 온 몸에 멍이 든다. 아프다. 쉽게 낫지 않는 상처들이 생긴다.

최근 그런 시를 읽었다. 놀랍게도 고등학교 친구가 쓴 시였다. 한 번 이 자리에 소개해 본다.



<미사여구 사이로>

숨죽은 정류장 밤길은 가로수 사이로 났소.

가로수들은 욕망도 없이

하늘의 여백이 채워지는 날만 기다린다오.

매듭지어져가는 앙상한 겨울나무가지,

그대들이 푸르렀던 날들을 나라도 기억하고 있다오.

뿌리 끝까지 맴도는 장마의 기억!

산골 분교의 아이들처럼 맨발로 낮선 곳을 뛰었다오.

그러나 이내 차박차박 소리도 심장에

우두커니 권태가 되었기로소,

어느 철학자가 말하길 ‘이때를 위하여-충분한 즐거움을 남겨두었으나

바다를 찾아 떠난 수많은 자아들이

결국 젓갈로 내 밥상에 오르게 되다.‘

.....그대들은 맑은 물이 있어야 자라지요.

가지고 있던 우산들을 모두 버린 후에

오지도 않은 마지막 날을 상상하며 비를 뿌렸소.

볼을 타고 흐르는 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주인 없는 무덤들이었다네

김광수



가로수의 존재근거는 도로에게 있다. 가로수가 아무런 나무가 아니라 가로수인 이유는 그것이 길 가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류장 밤길은 가로수 사이로 났’다. 가로수와 도로의 종속관계가 뒤집힌다. 적어도 시인에게는 도로가 있기에 가로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로수가 있기에 도로가 있게 된다. 나는 첫 행부터 저항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론 자연스러웠다. 그저 시인의 중력에 몸을 맡기고 시의 끝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로수는 욕망 없이 기다린다. 하지만 ‘기다림’이라는 감정은 욕망의 소산이다. 그립다. 보고 싶다. 만지고 싶다. 욕망이 기다림을 낳는다. 어떻게 기다림이 욕망 없을 수 있을까. 오직 체념하고 나서야 가능하다. 이뤄질 수 없음이 확실한 기다림만이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욕망 없는 기다림은 좌절되어버린 기다림이다.

그렇다면 가로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늘의 여백이 채워지길 기다린다. 겨울 하늘은 시리고 공허하다. 따뜻한 봄의 뭉게구름들이 시리게 푸른 하늘의 여백을 채우길 기다린다. 봄을 맞이하기 위해 가지에는 이미 매듭과도 같은 새순들을 준비해 놨다. 하지만 봄이 오지 않음을 그들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 없이’ 기다린다.

죽음과 겨울은 가로수를 뒤덮는다. 그 밑에는 미약한 봄과 생명의 흔적이 보인다. 그렇지만 죽음과 좌절의 승리는 예견되어있다. 그래서 슬프다. 그래서 시인은 애도한다. ‘그대들이 푸르렀던 날들을 나라도 기억하고 있다오.’

시인은 기억한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던 뿌리를. 장마철 진흙탕을 조그마한 맨발로 치대는 아이처럼 땅에 ‘차박차박’ 뿌리를 박던 가로수를. 그러나 그 마저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생명의 이미지가 가지는 활기를 잃었다. 우두커니 ‘권태’가 되었다.

‘차박차박’ 진흙탕을 밟던 소리는 생명의 소리다. 동시에 바다로 뛰어든 수많은 자아들이 물장구치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은 이들을 또 놓아주지 않는다. 이름도 모를 어부에게 잡혀 젓갈이 되어 밥상에 오른다. 시인은 말한다. ‘......그대들은 맑은 물이 있어야 자라지요.’ 앞에 놓인 말줄임표가 짠하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바다가 맑지 않음을, 자랄 수 없음을.

그래서 시인은 이 모든 죽음을 애도한다. 죽어 스러져간 것들의 눈물을 피하지 않기 위해 우산을 버린다. 눈물은 비가 되어 쏟아진다. 비는 다시 시인의 볼을 타고 흘러 눈물이 된다. 눈물은 땅으로 떨어진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 더 이상 눈물이 아니다. 세상 모든 죽은 것들의 그리고 죽는 것들의 또 죽을 것들의 주인 없는 무덤이다.

온 몸이 욱신욱신하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 일상 속에서 죽음을 생각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언제 죽어가는 것들에 대해 애도할 수 있을까. 온 몸에 난 멍들과 상처들을 보며 잊지 않도록 하자. 이런 시를 더 많이 읽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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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낙동강 어딘가.
일점 투시법의 완벽한 예시.




3.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




[월식(月蝕)]

어디 숨을 곳 하나 없이 태양이 떴소.

나그네의 외투처럼 가벼운 인력.

세 치 혀처럼 바싹 말라버린 대기권.

그 따갑도록 부끄러운 자외선에 뜨겁게 사지가 꿰이었소.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친 죄로 독수리에게 쬐였다면

나는 아쉬운 불씨를 잃은 죄로 형틀에 묶인 셈이오.

충혈된 눈은 하염없이 하수구의 쥐구멍을 쫓았으나

골목 구석의 맨홀구멍엔 커져버린 심장이 너무나 비대했소.

곰보같은 얼굴에 마지막 눈물이 마를때쯤에야

하늘은 이마에 시뻘건 낙인을 박으며 별을 띄웠소.

신월...다시 처음부터...초승달로...

참자...견디자.....초승달에서 상현달로...

출소가 머지 않았다... 상현달......상현달에서......

보름달로......

허나 번쩍거리는 쇠사슬을 끄른 자리엔 시린 수갑이

헐떡거리며 부풀어오른 염통은 포승줄로 밀봉되었소.

제 연인과, 가족과, 친지와 베란다로 나온 이들이 보고자 한 것은

출소가 아닌 수감이었소.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두부가 아닌 싸구려 캔맥주였단 말이오.

집요한 죄의 덩어리는 어느새 반바퀴를 돌아

그 찬란한 그림자로 날 가리우고 있었소.

억울하다면 억울한 또 한 번의 옥살이.

각혈에 적셔진 내 몸뚱이를 보고

저들은 아름답다며 건배를 외치고 있소.

만사가 형통하는 새해를 위하여...위하여...위하여.......


[출처] 월식|작성자 한동엽



달은 빛을 내지 못한다. 낮에는 태양의 빛 아래에 가리고, 밤에는 태양을 받아 빛을 낸다. 태양의 찬란한 빛의 편린(片鱗)을 빌려 곰보가 잔뜩 나있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바쁘다. 그래서 항상 달은 수치스럽다. 한동엽 시인의 말처럼 ‘따갑도록 부끄러운 자외선’에 뜨겁게 사지가 꿰여있는 존재이다.

실존의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을 수 없는 존재는 결국 관성적 일상에 삶의 방향타를 맡기게 된다. 주체성을 상실한다. 사유하고 질문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일상의 경험을 좇는다. 물론 일상의 경험 속에서 자신을 고양하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자신의 삶과 인생에 만족감을 준다. 그렇지만 스스로의 존재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일상적 삶의 관성에 몸을 맡겨 주체성을 잃는다면, 실존은 허락되지 않는다.

한동엽의 시에서 등장하는 ‘나’는 프로메테우스와 주체성과 실존의 측면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존재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게서 불을 훔치고, 인간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는 이 행동이 신들을 분노하게 할 것이며, 또한 자신이 그 분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즉 그의 행동은 주체적 행동이다. 그렇기에 그는 끝없이 반복되는 형벌이라는 일상 속에서도 실존을 잃지 않는 존재다. 이에 반해 ‘나’는 불씨를 잃어버린 죄로 처벌 받는다. 이 행동에서는 일말의 주체성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그는 끝임 없이 자신을 책망하며 ‘하수구의 쥐구멍’을 쫓으나, 그마저도 실패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원의 수감 생활이 언젠가는 끝이 나겠거니 하며 스스로에게 참자라고 읊조리는 것뿐이다. 일상 속에서 주체성을 상실한 채 관성에 몸을 맡긴다.

그런 ‘나’가 받는 형벌의 모습이 3연에서 달의 변화모습으로 구체화 된다. 이 과정에서 주체성과 실존을 상실한 ‘나’의 존재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달’의 모습과 오버랩되며 ‘나’의 정체가 밝혀진다. ‘나’는 하늘이라는 형틀에 못 박히고, 그 곳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고 있는 달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나’는 여기서 달이 변화하는 양상을 형벌로 인식함과 동시에, 보름달이 되는 것을 형벌의 종착인 출소로 규정하고 있다. 달은 차면 기울고, 기울고 나면 다시 찬다. 그렇기에 보름달이란 일시적 상태일 뿐, 형벌의 끝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나’의 판단은 틀렸다.

4연에서 ‘나’는 그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번쩍거리는 쇠사슬을 끄른 자리엔 시린 수갑이”, “염통은 포승줄로 밀봉되었소.”


형벌의 끝이 잉태한 것은 자유가 아닌 또 다른 형벌의 시작이다. 사람들 손에 들린 것은 출소를 기념하는 새하얀 두부가 아니라 찌그러진 맥주 캔이었다. 진동하는 그래프의 고점에서 다시 추락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영원히 지속 되는 형벌 속에서 탈출 할 수는 없을까. 우리의 실존과 주체성을 찾을 방법은 없을까. 시인은 그 가능성을 바로 시의 가장 첫 머리에서 제시하고 있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태양과 달의 종속 관계가 뒤집어지는 전복의 경험. 일상을 낯설고 충격적이게 왜곡시키는 경험. 『월식』을 통해 시인은 그 가능성을 찾는다. ‘집요한 죄의 덩어리’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우리를 죄 속에서 가두고 형벌로 통제한다. ‘또 한 번의 옥살이’라는 표현에서 그 함의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말한다. 월식의 경험을 통해 일상성 속에서 벗어나 찬란한 실존의 빛 앞에 우리의 몸뚱이를 맡겨보자고. 그 경험이 우리를 낯설게 만들고 힘들게 해서 ‘각혈에 적셔’져 우리의 몸뚱이가 붉어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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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전라남도.. 어딘가?
과 답사 갔을 때였던 것 같다만.




4. 시 읽기의 즐거움



위의 세 글 모두, 대학교에 들어 오기 전 썼던 글이다. 물론 지금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렇게나 휘갈겼던 문장들도 많아 보이고, 비문과 오탈자도 간간이 보인다. 겉멋만 잔뜩 들어서 온갖 문구는 다 가져다 붙여서 글을 쓰고, 그것이 좋은 글인줄 알았던 때였다. 그러니까, 절대 잘 쓴 글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때는 열정이 있었다. 시 읽기가 즐거웠고,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평을 붙이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던 떄였다.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다시금 저런 열정을 가지고 시를 읽고 글을 쓰고 싶어지는 밤이다. 오늘은 시집을 한 편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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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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