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낮의 시, 한 밤의 묵독 [도서]

글 입력 2019.08.02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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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만난 시를
한 밤에 선물하는 것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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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제일 처음으로 떠오르는 '시'가 있다면 그 사람의 감수성은 아직 유효한 것이다.

'시'라는 문학 장르는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익히 접하는 장르다. 다만 흔히는 '시'를 대입 입시의 과정에서 문제풀이를 위한 '몇 번의 문제 들'로 만나다 말게 된다. 필자 역시 '시'를 알듯 말듯 한 단어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글이라 생각했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시'는 나와 상관이 없는 영역의 것이 되었다.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어코 알아내겠다는 집념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시'는 본래 읊는 것으로, 마음속과 시의 내용이 서로 만나 울릴 때야만 의미 있는 것이다. '시'를 '시'답게 온전히 바라보는 훈련을 대학 학부 시절 마지막 수업인 현대시 과목에서 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그들의 배경이나 업적으로 형성된 선입관을 가지고 해석해왔던 오류를 짚고 넘어갔다. 사상적 의도가 아닌 그저 한 인간으로서 느꼈던 감정을 조심스럽게 글로 풀어낸 것이 '시'다.

한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감정과 생각들이 꾸밈없이 담길 수 있는 문학 장르로서의 역할이다. 온전한 개인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개인의 경험 중 일부가 중첩된다는 의미다. 이러한 감정의 마주침 없이 '시'를 논리적 사고의 틀에 넣어 이해하려 했으니 '시'의 내용이 어렵게 다가온 건 당연했다.

'시'란 이해의 영역이 아닌 '감정의 울림의 순간'임을 알게 된 뒤, 필자는 최근 6월에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시집을 구입했다. 생애 첫 시집이기도 한 이 시집의 주제는 '치유와 깨달음의 시'다. 힘든 감정이 찾아올 때 짧은 글귀나 사람의 위로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을 이 시집은 채워주었다. 여백과 글만이 있는 이 시집은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가리킨다.

아마 이 시집의 내용이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꺼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제각기 다른 시인들이 쓴 시를 읽으면 그들의 경험이 바로 나의 경험이었고, 그 경험을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지혜를 알 수 있다. 시집 속 시인들의 감정에 마주치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인숙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렁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 잘랄루딘 루미



시집의 초입에 등장하는 잘랄루딘 루미의 '여인숙'이라는 시다. '치유와 깨달음의 시'라는 시집의 전체 흐름답게 사람의 내면의 감정을 손님과 초대라는 환대의 개념으로 묘사했다. 이 시에서 중요한 지점은 바로 '슬픔의 군중'과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라는 부정적 감정들이다.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지만 상처가 되는 일들을 겪었을 때 사람은 가장 의존적이게 된다. 기쁘거나 즐거운 일들은 사람을 우뚝 서게 하지만, 그와 반대되는 일들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 입장으로 만든다. 개인주의가 당연시되는 현대사회에 무언가 의지하는 대상을 찾는 감정은 현대인에게 더욱 낯설 수밖에 없다. 혹여 그 대상을 찾는다 해도 온전한 위로를 받기란 무리다.

'여인숙' 시는 다른 이에게 기대하기보다는 자신이 느끼는 그러한 감정조차도 인정하라고 말한다. '초대'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문 밖에서 집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 즉, 함께 시간을 보내는 허락의 표시다.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과 생각을 잊어버리거나 지우는 것이 아닌 일부로서 수용할 용기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여인숙' 시는 부정적 감정이 어떠한 경험으로 찾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 이후에 대해서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그 감정들을 마주할 것을 권하고 있다. 어떠한 감정도 쓸모없지 않으며 가치 있음을 '손님'이라는 존칭을 담는 단어를 사용해서 말이다. '여인숙'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집은 시를 읽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먼저 울림을 건네고 있다. 자신의 실제 마음이 무엇인지 몰라 헤매는 현대인들에게 감정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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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경험을 새롭게 마주하는 기회는 흔치 않다. 흔히는 그 깨달음의 순간을 또 다른 사건이나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재해석한다. 하지만 '시'는 그 과정에서 오는 시간을 단축시킨다.

'여인숙' 시를 통해 필자가 경험에서 오는 부정적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잠시 생각해본 것처럼 말이다. '시'는 그 시를 쓴 시인의 생각이 온전히 담겨, 그 사람을 글로서 마주할 수 있게 한다. 종이 위에서 글로 읽어내려가는 한 사람과의 대면은 생각과 생각의 만남이며 예기치 않은 지점을 발생시킨다. 그 지점이 '치유와 깨달음'이다.

이러한 '치유와 깨달음'은 바쁜 일상의 와중에 접할 때 그 힘이 더 강력하다. 한낮의 시간은 업무를 보거나 개인의 삶이 한창 움직이는 때다. 시집은 틈을 내어서 자신의 감정을 돌볼 여유조차 없는 현대인에게 자상한 손길로 틈을 만들어버린다. 휴대하기 간편한 크기와 짧지만 마음에 와닿는 섬세한 구절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변하지 않는 손길을 내미는 시집 속 시는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쉼을 준다. 예민하고 변하기 쉬운 사람의 감정을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살펴본다. '시'는 우위에 서서 억지로 이해하려는 영역이 아닌 '시'가 건네는 말들에 가만히 경험과 감정을 내비치는 과정이다.

'시'를 통해 깨달음과 위로를 받은 사람은 시집의 시인처럼 시를 쓰거나 또 다른 이에게 시를 선물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수많은 시인들이 있었던 것도 바로 먼저 받았던 위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시집은 이미 많은 화자 된 시집이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관련한 글을 기고하는 것은 그만큼 이 시집에 담긴 시가 주는 울림이 아름답다는 걸 말하고자 함이다.

필자가 한낮에 읽은 이 시집의 시를 소개하는 것처럼 독자인 누군가도 마음속 울림을 가져다준 시를 발견하여 전하는 자가 되었으면 한다. 한낮에 발견한 시를 다른 누군가가 조용히 자신을 마주할 하루 일과가 끝난 밤에 묵독하며 또 다른 깨달음이 있다면 무척 아름다울 것이다. 누군가에게 시와 같은 위로를 전하는 자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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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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