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토끼와 거북이의 비극, 마지막 동화

글 입력 2019.08.02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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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부터_이제우,_김언수,_이창기2.jpg


작품을 감상하고 나오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먼저, PRESS로서의 기쁨이다. PRESS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이토록 취지에 맞는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은 처음이다. 날씨 때문도 있지만, 작은 소극장에서 그리 많지 않은 관객들과 작품을 감상했다. 하지만 직접 만나게 된 작품은 최근 필자가 감상한 다양한 연극 중에서도 감히 기억에 남을만한 완성도를 보였다.


필자는 극단 RESET의 연극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상되길 원한다. 극단의 다음 연극이 있다면 PRESS 활동과 별개로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완성도 있는 작품을 감상하고 다른 예술 애호가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 몹시 기쁘다.


김언수_작가_役_3.jpg
 


두 번째, 이런 연극에 대한 칭찬이 무색하게도, 필자가 이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가끔 '좋은 작품이었어', 혹은 '내 취향은 아니었어'라는 식의 평가를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필자는 주로 예술 작품에서 필자의 삶과 밀접한 어느 부분을 발견할 때 그렇게 느낀다. 이런 작품은 평가가 불가능하다.


논평의 객관성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면 공정한 평가는 어느정도 개인적 삶과 거리두기가 가능해야 한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콤플렉스가 강한 사람이 모든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무언가를 감상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왔다. 이렇게 썼지만 이 경계는 쓰는 필자부터 애매모호하기에, 당장 지금 필자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해 온 작품의 어디까지가 감상문이었고 논평이었는지를 새삼스럽게 밝히기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뭐가 되었건 유독 이번 작품이 그랬다. 작품의 주인공이 하는 고민은 이십대 언저리에서 필자가 했던 고민, 어쩌면 지금까지도 끊을 수 없었던 그것과 많은 부분 비슷하다. 작품을 감상하는 중 작가의 목소리에 계속 필자와 겹쳤다.


작품의 주인공은 작가라는 정체성 위에서, 필자는 시민이라는 정체성 위에서 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이 작품은 예술로 사회변혁을 꿈꾸었던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감성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이 그러했듯이, 연극의 내용이 개인적 이슈까지 뻗어간다면, 연극은 한층 더 복잡해진다.


좌_이제우_거북이役,_우_김언수_작가_役.jpg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주인공은 7년간 동화 공모전에 낙방한 무명의 동화작가다. 칠전팔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는 8번째 공모전의 면접에서 심사위원들에게 강도 높은 비판을 받으며 다시 낙방한다. 작가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사채업자가 한 청년을 잔인하게 때리는 모습을 보고 약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강자를 이길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린다.


작가는 '토끼와 거북이'에서 토끼가 잠에 들어서 거북이가 이긴 원작의 우연에 기댄 결말은 실제 사회에 대입되지 않기 때문에 약자들이 고통받는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거북이가 스스로의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토끼를 이길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는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방법을 찾지만, 그것이 정말 '정정당당'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극의 마지막, 쓰러진 토끼는 사채업자에게 두들겨 맞아 기절한 청년으로 대체된다.

작품에서 동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동화는 아이들에게 사회적 가치의 기초를 알려주는 도구였으나, 작가가 말한대로 동화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부분을 주목한 비슷한 작품으로 <실질객관동화>라는 웹툰이 있다. 토끼와 거북이를 단순히 끈기와 성실성의 비유로 바라보기에는 현대 사회가 너무 복잡해졌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수저론이라는 농담이 등장할 정도로, 세상은 끈기와 성실성의 보답을 편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을 믿는 것은 말그대로 '어린애'같은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동화작가인 주인공은 초등학생같은 복장을 하고 그 가치를 수호하려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그와 같은 노력도 또 하나의 집착과 투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좌_이제우_거북이_役,_우_이창기_토끼_役3.jpg
 


작가는 필자에게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거북이(약자)가 토끼(강자)를 나눈 것은 무엇인가?" , "예술은 사회변혁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즉 예술이 정말 밥을 먹여주는가?", "욕망이 투영된 이상은 사회를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가?"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작품에서 등장하는 '현실'과 '연극, 즉 작가의 상상세계'가 정반대의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작은 극장인데도 두 공간을 명백히 구분해 놓은 것이 흥미로웠다. 사채업자와 청년은 관객들이 출입한 곳에서 등장하며, 장막 뒤에는 어린 아이같은 낙서로 가득찬 무대가 있다. 전자는 음울하고, 후자는 작가의 특성을 드러내듯 높은 텐션을 유지한다. 작품은 주로 후자를 다룬다.


답을 찾으려는 작가의 의욕을 반영하듯이 이 작은 연극 속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진다. 랩배틀, 영화 속 한장면, 다양한 형식으로 토끼와 거북이는 계속해서 경주를 한다. 작가가 거북이라는 약자에 자신을 투영하게 되면서 강자에 대한 분노와 집착은 짙어지지만, 기본적으로 연극의 공간에서 대사는 놀라울정도로 위트있게 쓰여졌다. 그래서 무거운 메시지를 다루고 있는 연극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결코 무겁지 않다.

현실의 시간은 개인이 상상 속 세계에 영영 있는 것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작가도 결국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남은 것은 그가 '뮤즈'라고 부르고 거북이를 투영했던 기절한 청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쓰러진 자리에는 작가가 때려죽었던 토끼가 있었던 자리였다. 이 지점에서 어린아이같은 복장을 한 작가도 창백한 표정을 짓는다.


그를 뮤즈라고 불렀던 녹음기의 내용이 재생된다. 누가 그를 토끼라고 불렀는가? 누가 그를 거북이라고 불렀는가? 본질적인 질문 앞에서 관객들은 잠깐 숨을 멈춘다. 개인적으로는 대사, 연출, 연기, 메시지까지 모나지 않은 수작이었다. 극단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마지막_동화_포스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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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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