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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장 소중한 클라이언트
글 입력 2019.07.29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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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침대에서 등을 뗄 수 없는 날. 이 세상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 것 같은 날이 찾아온다. 나를 위한 밥상 위에 그릇을 두 개 이상 꺼내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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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일상툰 <퀴퀴한 일기> 321화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파괴의 계절’에 관한 내용이다. 만화는 A양이 B양에게 요즈음 자기 삶을 털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 요즘 운동 1분도 안 해.

만날 정크푸드만 먹고 영양제도 안 먹어.

퇴근 하고 집 와서 세수도 안 하고,

드라마 보다가 잔다?


 무기력이 제대로 와서

운동이고 청소고 뭐고,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거야.



B양은 그런 그녀에게 반찬을 예쁜 접시에 따로따로 담아 대접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너, 지금 ‘자기 파괴의 계절’을 겪고 있구나?”


이 단어에서 쉽사리 다음 컷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나의 삶을 도촬당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파괴의 계절


 

카페 아르바이트를 꽤 오래 했었다. 손님이 케이크를 고르면 예쁜 접시에 담아드리는 일을 주로 했는데, 밋밋한 접시가 꽤나 심심해 보여서 보통은 각종 시럽으로 케이크 주변을 예쁘게 꾸며서 나가곤 했다.


케이크 주변에 휘리릭 뿌리는 초코 시럽이 맛에 미치는 영향은 사실 아주 미미하지만, 시럽 모양이 조금이라도 뭉그러지면 가차 없이 그 접시는 싱크대로 들어갔다. 일을 할 때는 항상 그렇다. 손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항상 최상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나를 위한 음식을 먹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할 수고로움이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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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혼자 밥을 먹는 날이면 플레이팅은 무슨, 조금이라도 설거지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 한 그릇에 몽땅 넣곤 한다. 어울리지도 않는 재료들이 대충 뭉그러져 있는 밥은 참 맛이 없다.

사실 접시에 따로 담아 놓은 소시지도, 밥 위에 대충 얹어 놓은 소시지도 맛은 똑같은데. 어쩐지 그렇게 만들어진 밥은 온전하게 앉아 먹기도 싫다. 그대로 싱크대에 서서 먹거나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일을 하면서 먹다 보면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깟 그릇 하나 설거지 하는 게 뭐라고, 그 작은 무기력함에서 나오는 무력함은 생각보다 크다.




위태로운 젠가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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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젠가와 퍽 닮았다. 나무도막 하나를 슬쩍 빼 버려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고개 돌리는 순간 퍽. 공들여 쌓은 탑은 몽땅 무너져 버리고 만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날들은, 어쩌면 엉성하고 위태로운 젠가를 바들바들 지켜 내는 과정이 아닐까.


대충 때우는 밥 한 끼, 아무렇게나 구겨 놓은 옷가지 같이 당신이 무심코 놓쳐 버린 일상의 한 조각이 이때껏 견고하게 쌓아 두었던 탑을 무너뜨려 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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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가장 소중한 클라이언트다. 나의 세계를 찾아주는 가장 중요한 고객이다. 이런 나를 내가 소중하게 가꾸어 주지 않으면 나의 세계는 누가 돌봐 줄 수 있을까?

*

나를 위해 빳빳하게 다린 옷, 나만을 위해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 지친 나를 반겨주는 가지런한 이부자리와 위로가 되어 주는 음악. 작지만 나의 세계를 빼곡하게 채워주는 조각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누구나 한번쯤은 이 계절을 겪는다. 당연한 일이다. 나 또한 무기력함의 웅덩이에서 찰박거리는 중이다. 그렇지만 이깟 나무도막 하나가 내 탑을 무너뜨리는 일이 너무 싫어서 기를 쓰고 지키고 있다. 이를 악물고 방을 쓸고 거울을 닦는다. 위태롭지만 어쨌든 나무도막은 빠지지 않았고 나의 세계는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

혹시 당신이 지금 이 계절 한가운데 서 있다면, 오늘 하루만이라도 당신만의 사소한 나무도막들이 삐져나오지 않게 잘 다독여 주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은 오늘만큼은 캄캄한 무기력함에 잠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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