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유희] 02. 비평과 감상, 그 사이의 경계에 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글 입력 2019.07.30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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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모형 '장난감.'



1. 가볍게 즐기는 것과 무겁게 파고드는 것 사이의 경계


 

주변에 꼭 한명씩 있다. 영화를 보건, TV 프로그램을 보건, 문학책을 읽건, 작품을 단순히 감상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해석의 폭을 확장하는 사람. 이런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 경향성을 띤다. 상대방의 논리력과 박학다식함에 감탄하거나, 작품의 사소한 부분까지 물고 늘어지는 상대방을 보며 피곤해하거나. 개인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상이하게 갈릴 것이다. 저 사람은 정말 생각이 깊은 것 같다고 느낄 수도, 반대로 왜 저렇게까지 깊게 고민하면서 살아야 하나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렇게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는 두 생각들 간에도 공통점은 있다. 그런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단순하게’ 작품을 ‘즐긴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품을 즐기는 것과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별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종 ‘가볍다’ 혹은 ‘무겁다’라는 단어를 자신의 평가에 덧붙여, 평론의 성격이 어떠한지 드러낸다. 글을 읽기도 전부터 내용을 미리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글을 클릭할지 말지의 결정이 십 초 이내로 내려지도록.

 

조금 더 구체적인 용어를 동원해보자면, 위에서 언급한 ‘가벼움’에는 감상이, ‘무거움’에는 비평이라는 용어가 대응될 것이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매칭이다. 영화가 끝난 후 작품의 플롯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거나 머릿속에서 간략한 평가만 내리는 것. 혹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까지도 플롯의 세밀한 부분까지 떠올리며 작품의 의도나 기법을 분석하는 것. 양자는 확실히 다르다. 대부분은 전자가 가벼운 감상에 해당하고, 후자가 무게 있는 비평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보다 전문적인 영역이라 여긴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어떤 학문이나 분야를 접할 때, 발만 담그는 수준과 그것을 깊게 파고드는 수준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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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 하트.



문제는 가벼운 수준과 무거운 수준 사이의 경계가 제대로 확정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작품을 단순히 오락의 일환으로 즐기는 수준이며, 어디서부터 작품을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수준이라 부를 수 있는지. 나는 오늘날의 문화예술이 이러한 질문에 답변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기준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이름만 달면 평론가며, 작가며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수많은 작가들과 전문 평론가, 저널리스트들은 끊임없이 탄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내뱉을 때면 연쇄적으로 딸려오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비평과 감상을 구분할 수 있는, 비평가의 전문성을 입증할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는가? 그건 또 아니다. 일단 내가 생각했을 땐 없다. 기본적인 문장력? 올바른 맞춤법? 주장을 뒷받침할 적절한 근거 제시? 그런데 이들은 비평에서만 요구되는 조건이 아니지 않나. 대중적으로 전문평론가라 불리는 사람들도, 정확히 어떤 조건이나 기준에 따라 그렇게 규정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전문평론가인 그 사람을 마주했던 거지, 그 사람이 왜 전문평론가인지 세세하게 따져볼 겨를은 없었다. 단순히 ‘이정도의 경력을 쌓았으면, 이정도 명성이 있으면, 이만큼 식견이 넓으면, 이만한 활동을 했으면~’과 같이 추상적인 수식어만 봐 왔다.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둘 사이의 경계는 지금까지 무너져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릴없이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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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의 잔해. 쓸데없이, 대체 왜 이렇게 영롱.




2. 무너지면 큰일인가?


 

그런데, 무너지는 게 꼭 부정적인 현상인가? ‘진짜’ 비평가는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다. 비평가와 감상자를 구분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 왔고, 지금도 어느 한 구석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하더라도, 그 기준의 객관성을 입증할 또 다른 기준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이쯤이면 글을 읽다가 짜증이 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 얘는 도대체 어쩌자는 걸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가능성의 단초를 여러 개 나열하고 있다. 애초부터 답이 안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은, 이번 장의 소제목에서 밝혔듯 정말 비평과 감상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면 큰일인지 생각해보겠다.

 

무너지면 큰일이라는 말은 곧, 비평과 감상을 어떤 기준에 의해서 구분할 수 있다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뜻이 된다. 보통 이 쪽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평만이 가지는 어떤 고급진, 우아한 느낌이 있다고 믿는다. 영화를 보고 ‘아, 이 영화 정말 재밌네요.’ 라고 말하는 것과 ‘이 작품에 사용된 촬영 기법은 ~~하고, 이를 통해 감독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 있고...’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자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비교적 지식이 풍부하고, 권위가 있는 자라고 여긴다. ‘단순히’ 감상‘만’ 하는 사람과 작품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을 구별한다.

 

비평이 녹여내야 할 것으로 제시하는 조건들은 제각기 다양하다. 공통점을 찾자면, 작품을 정의하는 비평가 자신만의 방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 방식에 여러 조건들을 녹여내어 주장-근거의 형태로 이루어진 문장들을 양산해야 한다는 것.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이런 방식으로 비평과 감상을 구별하는 건 둘 간의 위계를 설정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은연중에 비평이 감성에 비해 좀 더 번거롭고 까다롭고, 구체적인 해석 작업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랜 시간동안 주류를 점해왔던 의견은 이쪽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평가인지는 시대별로 다양한 입장을 고수했겠지만, 비평가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했던 경향만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이렇게 비평가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의견은, 특정 작품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들로 기능한다. 우리가 위키백과나 구글, 네이버 등에서 작품을 검색했을 때 마주하는 정의들, 평가들로 말이다.

 

반대로 무너져도 큰일이 아니라는 쪽은, 둘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는 일 자체가 소모적이고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견이든 나름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고,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 작품을 정의하는 틀이 된다는 거다. 이들의 입장은 도발적이다. 비평가와 감상자 사이의 위계를 형성하는 기존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원한다면 모두가 비평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요즘 사람들이 제기하는 의문도 이와 비슷하다. 대체 평론가는 어떤 사람이 하는 건지, 그런 사람의 평가가 정말 전문성을 띠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은 전문 평론지에 실린 평론가의 의견들이 불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신빙성이 없다고, 괜히 작품 이상한 쪽으로 감상하게 만든다고. 나는 그렇게 안 느꼈는데, ‘그 사람이 뭔데’ 작품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냐며. 어쩌면 이런 의견들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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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도에 휩쓸리는 ‘예술’


 

현대예술에서 예술은 규정의 영역이다. 내가 이렇게 표현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배경적인 측면에서, 과거의 사조들이 쌓일 대로 쌓여서 더 이상 캔버스 위에, 물감과 연필로만 구현할 수 있는 미술 기법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활용할 수 있는 기법들은 무궁무진하고, 이에 제한은 없다. 다음으로, 창조와 혁신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가가 분출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는 극에 달한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예술가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온전히 자신의 주관에 따른, 자신이 선호하는 작품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감상자의 자유도 극대화된 상황이다. 다른 사람들이 예술작품이라고 말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예술이라 생각하면-적어도 본인에게는 창작물이 예술 작품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환경적 조건들로 인해 예술작품을 구별할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말 그대로 답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은 알다가도 모르겠는 영역이자, 보통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다. 글로든 말로든 어떻게 규정되느냐에 따라, 무엇이 예술이었다가 예술이 아닐 수도 있게 된다. 상황을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된 요인은, 시중에 쏟아지는 수많은 글들이다. 전문 평론가를 자처하는 사람이 쓴 글, 예술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람이 쓴 글, 또는 예술을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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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착.



예술을 예술이라 규정하는 수많은 글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제각기의 입장이 다르다보니 글쓴이들을 향한 신뢰도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것이다. A라는 창작물을 두고 어느 쪽에는 예술이라 인정하지만, 또 다른 쪽에서는 예술이 아니라고 동시에 주장하다 보니-당최 무엇이 옳은 진술인지 감상자 입장에서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소위 전문 평론이라 불리는 일간지나, 그런 평을 작성하는 평론가들을 향한 불신의 뿌리가 자라나는 것일지 모른다. ‘평론가라고 해봤자 정확한 평을 쓰지도 않는 것 같던데?’, ‘대체 뭘 근거로 저렇게 평가하는 거야? 난 저렇게 생각 안하는데.’ 온갖 의심의 눈초리가 난무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비평과 감상을 나누는 경계가 불신의 뿌리를 양분으로 삼으며 급속히, 더 빨리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계는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전보다는 미약하지만 여전히 전문비평가, 평론가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명되는지, 어떠한 글이 좋은 비평인지 등은 중요한 논쟁거리다. 아직도 사람들은 가벼운 분위기의 글과 무거운 분위기의 글을 구분한다. 그렇지만 경계는 무너지고 있다.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글의 분위기와 성격을 구별하는 와중에, 그러고 있는 스스로에게 대체 전문적인 글은 어떤 것인지 자문한다. 그 덕분에 감상인지 비평인지 모호한 글들과, 기존의 전문성이 보이지 않는 평론들이 수도 없이 쏟아진다.


기존의 인식을 바탕으로 생산되는 비평문과 감상문. 그 사이의 모호한 글들. 어쩌면, 이러한 구분조차 의미 없을지 모르는 지금의 상황.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양산되고 ‘규정되는’ 수많은 예술 작품들. 그리고 무너지는 경계에 서 있는 우리.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나는 선택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 단지 상황이 이렇다는 걸 알려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더 많은 생각과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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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각글 하나 : 조나단의 비행



앞으로 매 칼럼마다 나의 조각글이 한 편씩,

햄버거 세트에 딸려오는 피클마냥(!) 올라올 예정이다.

글감은 랜덤.

    


갈매기들은 대부분 가장 단순한 기술로만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배우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먹이를 구하는 일이었다. 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하지만 갈매기 조나단에게는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것이 문제였다. 그 무엇보다도 조나단은 비행을 사랑했다.

 

조나단이 수면 위에서 날개 절반 정도의 높이로 나는 때를 빼고는, 힘을 덜 들이고 공중에 오래 머물러 있는 이유를 그들은 알지 못했다. 다른 갈매기들처럼 발로 물을 차 물보라를 일으키며 끝나는 비행과 조나단의 비행은 달랐다. 유선형으로 단단히 구부려 몸 쪽에 붙여두었던 발이 수면에 닿으면 길고 단조로운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것이 조나단의 비행이었다. 그는 비행을 시작했을 때 해변에 내려서서는 자기가 활강한 길이만큼 모래 위를 걸어 그 길이를 재어보기도 했다. 조나단의 부모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몹시 당황스러워 했다.

 

"존, 왜 그러니?" 그의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왜 다른 갈매기와 다르게 행동하니? 낮게 나는 것 따위는 펠리컨이나 신천옹에게 맡겨버리는 거야. 그리고 너는 왜 잘 먹지를 않니? 너무 말라서 이제는 뼈와 깃털뿐이잖아?"

"뼈와 깃털만 남아 있어도 상관없어요, 어머니. 저는 단지 창공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 저는 단지 알고 싶을 뿐이라고요."

 

- 리처드 바크(Richard Bach),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 197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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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비행기.

서울대학교 미술관 <재난> 전시 작품의 일부.

민유정 작가.



가스통 바슐라르(프랑스의 과학철학자, 1884-1962)는 필요 이상의 것에 대한 정복이 필수적인 것에 대한 정복보다도 더 큰 정신적 자극을 준다고 역설했다. 갈매기들에게 필요한 것은 먹이를 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나단은 다른 갈매기들과는 달리 필요 이상의 무언가, 비행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갈매기들이 먹이를 찾고자 그저 단순하게 하늘을 날아다닐 동안, 조나단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행위 자체를 사랑했다.

 

다른 갈매기들과 조나단 사이에서 생기는 차이에 의해 조나단의 삶은 차별적으로 승화된다. 조나단의 삶에는 차별성으로부터 오는 삶의 가치와 의미가 생긴다. 오로지 ‘생존’이라는 단일한 목적만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갈매기들에 비해 조나단의 삶은 이러한 목적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는 아무리 굶주리더라도 자신이 확실하게 ‘원하는’ 일, 자유로운 비행을 계속하고자 하므로 그의 인생엔 색깔이 존재한다.

 

현실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생존이라는 필수적인 요소만을 추구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며 제각기 다른 삶을 꾸리고자 한다. 이때 필요 이상의 것이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흥미롭게 여기는 것, 호기심을 느끼는 것들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이로써 저마다의 삶에는 ‘사회적인 차이’가 생기며, 이를 통해 각자가 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지 답을 얻는다. 이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조나단의 일화는 현실세계의 인간이 차별성을 추구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요건들이 만족되고 난 후, 자아실현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이 일화는 차별성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시도에 거대한 장벽으로 다가오는 ‘동일성’을 부각하기도 한다. 조나단의 어머니는 그가 왜 다른 갈매기와 다르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그의 아버지도 곧 겨울철이 다가오므로 먹고 살기 위해 일단은 먹이를 구하라고 타이른다. 이는 조나단에게 일종의 족쇄로 기능한다. 일단 목숨을 유지해야 그가 원하는 비행도 계속해서 연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나단과 같은 사람을 종종, 현실을 모르고 이상만 믿고 날뛰는 인간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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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한 비행기의 잔해.
또 다시 민유정 작가.



무시할 수 없는 지적이다. 필요와 필요 이상의 것의 우선순위를 따지면 우선적으로는 필요가 필요 이상의 것보다 먼저이다. 본문의 마지막을 읽다보면 그가 먹이 찾는 일에 잠시나마 노력을 기울이지만, 금세 염증을 느끼므로 다시 비행에 몰두할 것이라 예측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는 지속적으로 먹이를 찾는 일(=동일성)과 충돌을 빚을 것이다. 다른 갈매기들과 마찬가지로, 조나단 역시 생물학적인 존속을 영위해야만 한다. 사회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건 그 다음의 일이다.

 

조나단의 일화는 타인과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타인과의 동일성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오늘날의 현대인을 대변한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본인이 원하는 공부나 일을 하고 싶어도 ‘취업’, ‘생계’라는 벽에 가로막혀 결과적으로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돈을 벌며 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은 자기 자신이 원하고, 자기 자신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걷고자 하지만 결코 현실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차별성이 역설적으로 동일성의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존재의 영위를 초월하여 스스로의 자아를 확립하려는 개인의 시도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작품 전반에서 드러나는 조나단의 가치관은, 곧 작품의 주제의식으로 직결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 겹을 더 벗겨내면, 그런 주제의식을 발목 잡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일단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면, 필요가 충족되기 이전까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필요가 언젠가 완전히 충족되리란 법도 없다. 작가는 이 점까지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정말 딱, 표면적인 주제의식만 포착하길 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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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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