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위태롭고 투명한, 유리알같은 단편집 [도서]

앤드루 포터의 섬세한 단편 데뷔작
글 입력 2019.07.25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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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여름과 겨울. 인생의 많은 부분들이 이러한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이야기 되고 구분되곤 한다. 한때는 나도 행복한 삶은 행복만 가득하고 슬픈 삶은 슬픔만이 가득하리라 여기곤 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도 삶의 흐름을 여러 해 동안 느끼고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모든 반대되는 개념들이 홀로 존재하지 못하듯이 빛이 빛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림자와의 대비가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이런 삶의 부분들에 대해 이 단편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10편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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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미국의 소설가 앤드루 포터의 2008년 데뷔작이다. 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의 이름을 딴 ‘플래너리 오코너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단편 소설집이긴 하지만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다 보면 10편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제 각기 다른 이야기 속에 비슷한 분위기의 공기가 숨쉰다는 것에 이 작가가 얼마나 이야기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는지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가진 상처에 대해서 눈물없이 서늘하고 담담하게 적어낸다. 씁쓸하다는 단어 없이 씁쓸함을 설명하면서 이 소설의 독특한 분위기가 생긴다.

책의 제목이자 단편의 제목 중 하나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학생과 교수간의 미묘한 이야기이다. 헤더는 학교에서 듣던 강의의 교수인 로버트와 우연한 계기로 가까워진다. 둘 사이의 어떤 확신의 말이나 육체적인 나눔은 없다. 그러나 그 둘은 조용히 로버트의 아파트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남을 이어간다. 와인을 마시고 음반을 틀고 물리학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어디서도 말할 수 없었던 은밀하고 시답잖은 대화를 즐긴다.

어느 날 헤더에게는 남자친구 콜린이 생긴다. 그녀는 콜린을 사랑하지만 로버트에게도 사랑을 느끼며 관계를 놓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 콜린에게 관계를 들키고 로버트와의 인연을 끊게 되면서 콜린을 따라 멀리 떠나 그의 아내로 살아간다. 그러나 오랜시간동안 로버트의 빈자리와 어딘가 허한 마음을 채우지 못하던 와중 로버트의 죽음을 전해 듣고 무너진다.

헤더가 로버트를 사랑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소설 어디에서도 미칠 듯 강렬한 사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시작도 끝도 특별하지 않았고 오히려 담담하다. 폭우 같은 눈물이나 천둥 같은 고함도 없다. 정말 사랑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육체적인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짧고도 밋밋했던 인연 뒤 후유증은 헤더를 옥죄었다. 그와의 관계에서는 콜린은 채워줄 수 없었던 어떠한 정신적인 안정감이 있었다. 아마 그녀는 만남 도중 인연의 끝을 직감했을지 모르겠다.


"이런 만남." 그가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이런 만남을 뒤돌아보며 나를 미워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나는 그를 보았다. "내가 두려운 게 뭔지 알아요, 로버트?" 나는 그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요."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p.108


그들은 내 또래였지만, 그 순간 그들은 나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한 순간이었다. 로버트의 와인을 마시면서, 거기 어둠 속에 앉아, 결국은, 어쩌면 몇 시간 동안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떠나야 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p.128


그렇다고 헤더가 콜린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로버트에게 느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그녀는 그녀가 로버트에게 느끼는 마음에 대해 콜린에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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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소설집은 이렇듯 헤더가 콜린을 버리고 로버트를 택한다던 지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10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에게는 각자의 상처가 짙게 박혀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상처와 과거 그리고 현재에 대해 미칠 듯한 감정을 털어놓지 않는다. 한 순간 상황이 급변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절망적인 일이 일어나도 결국 하루의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어찌 보면 상처가 생긴 순간에는 놀라서 그 아픔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상처를 덧나게 만들어 더욱 깊어지게 만든다. 그렇게 매일 매일 곱씹다 보면 어느새 그 기억들은 나의 일부가 되고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상처들은 나 자신이 되어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뿌리를 박는다.


누나의 논리를 항상 이해하는 척해줄 수는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누나의 기분을, 그 변덕스러운 기질을, 누나의 갑작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분노를 이해하게는 됐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천천히 누나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가꾸기 힘든 씨앗, 우리 가족의 상담 치료사는 그걸 그렇게 불렀다.

- <폭풍>, p.234


아픔을 말하지 않았는데 아픔이 느껴지고 슬픔을 말하지 않았는데 슬픔이 베어 나온다. 문장들은 평범하고 담담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지만 어쩐지 그것들은 너무나도 서늘하게 느껴진다. 때로는 자책감에 빠져있는 것이 더 편안해 보인다. 기약 없이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기보다 체념이 더 쉬울 때도 있다.


삶은 계속되지만 달라졌다. 더 물러졌고, 더 지루해졌다. 즐거움은 덜해졌고 고통은 그 구렁텅이의 깊이가 한없어진 듯하다. 그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을까 늘 경계를 해야 한다. 그날 오후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누나가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그 구렁텅이의 가장자리에서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 빠질 마음을 먹지는 않으나, 그것의 존재로 인해 늘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구렁. 이제 누나는 마침내 그 안에 빠지기로 마음먹어버린 것 같았다.

- <폭풍>, p.240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감정들은 변하고 주변도 바뀐다. 어둠 속에 갇혀본 적 없는 사람이 빛의 소중함을 절절히 깨닫는 일은 기적에 가깝다. 빛의 소중함을 아는, 어둠을 겪어본 사람만이 언젠가 어둠 속의 타인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받으면서도 위로를 얻던 것처럼 말이다.

이미 상처의 모양대로 굳어버린 흉터의 모습과 빛과 그림자 같은 감정의 세밀한 이야기를 한 개인의 사생활을 엿 보듯 읽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위태롭고 아름다운 이 소설을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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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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