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슬기로운 휴학생활 [사람]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아.
글 입력 2019.07.2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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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 교복을 입고, 버스에 몸을 싣는다. 27정거장을 지나 학교에 도착하면, 오전 9시 1교시가 시작되고 5시가 되서야 학교를 나온다. 친구와 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고 미술 학원으로 간다. 되지 않는 묘사를 해보려 노력하다가, 그림을 벽에 붙인다.


나란히 붙은 친구들의 그림과 나의 것을 비교하자니, 역시 공부를 더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서를 쓴 대학의 최저등급에는 비벼보지도 못할 말도 안 되는 수능 성적을 받았고, 혼자 재수를 시작했다. 친구들은 다 어딘가에 속해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나만 그 언저리만 서성이고 있는지, 비참함을 느끼며 수능완성을 푸는 나에게 24살은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코앞에 있는 미래만 꿈꾸게 된 것이.

 

3학년 1학기 수강신청 며칠 전, 같은 과 친구들이 SNS에 휴학 신청했음을 알렸다. 휴학한 것이 부럽기는 하지만 나도 따라 휴학할 수는 없었다. 학교생활이 힘들긴 했지만, 휴학 후의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1년뿐인 휴학 생활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유난히 힘들었던 3학년 1학기가 끝나자, 너도 나도 도망가듯이 휴학을 했다. 학교 커뮤니티에 자취방 판매 글을 올리는 친구들을 보며 여전히 부러웠지만, 나는 여전히 휴학 후 계획이 없었다. 유럽여행이나 대외활동, 인턴 등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휴학하면 무언가를 해야겠다. 무얼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3학년이 끝나고 드디어 나도 휴학을 했다. 몸이 이곳저곳 아픈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더 이상 휴학을 미룰 수 없었다. 2019년, 지나간 6개월에 대한 회고를 해보려 한다.

 



드디어 나도 휴학을 했다



휴학에 대해 검색해보면, 토익, 대외활동, 아르바이트, 자격증 취득, 해외여행 등 휴학 중 꼭 해야만 하는 것들이라는 명목으로 주르륵 나오는 것들이 있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어서 아무래도 같은 디자인 전공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주워듣는다.

 

1,2월은 선택의 달이다. 애당초 커리어를 쌓기 위해 휴학하는 친구들은 이 기간 동안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제작한다. 커리어라고 한다면 보통 디자이너 인턴을 말하는데, 여태껏 해온 작업 중 포트폴리오에 넣을 작품을 솎아서 레이아웃을 짜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들이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지원서를 넣는 동안 나 같이 인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보통 푹 쉬며 보낸다.


대부분의 디자인 계열의 학과생들은 종강 직전에 무리한 밤샘과 불규칙한 식사로 인해 많이 지쳐있다. 그래서 보통 종강을 하면 말 그대로 죽은 듯이 잠을 자며 체력을 보충한다. 3월에 학교를 안 간다는 기쁨에 젖어 집에서 열심히 뒹굴 거리기도 하고, 병원에 다니며 고장 난 몸을 고치다 보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린다.

 

주변에서 ‘휴학하고 뭐해?’ 라는 질문을 하면 ‘멋지게 쉬고 있어’ 라고 대답을 해주었는데, 내가 그 멋지게 쉰 달이 3월과 4월이다. 강아지와 여유롭게 집 주변 공원도 산책하고,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동안 만나지 못한 동네 친구들과의 만남도 가졌다. 그중에는 학교를 다니는 3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친구도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을 왜 그동안 만나지 못했는지 조금 슬프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스스로를 ‘바쁘다’ 라는 굴레 안에 가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정신적인 여유로움



학기 중에는 조별 과제 모임이 새벽이 훨씬 넘어서 끝나는 경우가 있다. 모임이 파하고, 자취방으로 가는 동안 잘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한다. ‘수업이 9시니까 지금 집에 가서 씻고 바로 자면 3시간.. 아냐, 씻는 걸 포기하면 3시간 반… 택시 타고 학교 가면 3시간 45분..’ 이런 10분 단위의 계산을 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밝은 하늘색 바탕에 붉은 기를 띄는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조금만 더 까맣게 있지 왜 벌써 밝아진 건지 죄 없는 하늘이 괜히 미웠다. 깨어 있던 밤은 셀 수 없지 많았지만, 부러 고개를 들어 하늘은 쳐다본 적은 손에 꼽는다. 아침도 밤도 아닌 색의 하늘을 보면, 항상 열심히 분주하게 사는 주변 사람들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사는 나를 보는 것만 같아 얼른 고개를 떨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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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그 오묘한 색의 하늘을 볼 일이 없지만, 여유롭게 밤하늘을 쳐다보는 날은 많아졌다. 강아지와 밤 산책을 나오면 자주 벤치에 앉는다. 강아지는 지나가는 사람 구경을 하고, 나는 하늘 구경을 한다. 달이 유독 동그란 날은 휴대폰을 들어 사진으로 남겨 보기도 하고, 위성인지 별 인지 구분이 안 가는 별이 보이면 한참을 쳐다보기도 한다.

 

물론 그런 여유가 불안으로 바뀔 때도 많았다. 취업한 선배들이 지금이라도 실무 환경이 열악한 디자인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말을 하거나, 인턴을 하고 있는 친구가 전공에 대한 회의감을 토로할 때 등. 특히 내가 종강 후 디자인 툴을 한 번도 자발적으로 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그 불안감은 엄청났다. 내가 이렇게나 디자인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일을 업으로 삼아도 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되돌아 보다



고민 많은 봄이었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한 휴학이라 내가 일부러 일을 만들지 않으면 조급할 일이 없는 생활이었다. 그동안 미뤄 온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 둘해보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몰아 보기도 하고, 전시를 보는데 하루를 다 쓰기도 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확실하게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라라랜드> 같이 극 중 노래가 자주 나오는 영화를 나는 별로 안 좋아한다. 노래가 나오는 순간 영화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지고, 노래가 끝나도 다시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다. <인터스텔라>, <그래비티>를 보며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는 대중들이 느낀 만큼 재미있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우주가 배경인 SF영화여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너무 재미있어 두 번이나 보았다. 나는 슈퍼히어로 장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인셉션> 등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인 영화들은 장르에 상관없이 모두 재미있었다.

 

평소 ‘치약맛’ 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먹지 않았던 민트 초코는 실제로 먹어보니 먹을만했고, 베트남 쌀국수에 얹어 나온 고수는 비누를 씹어먹는 느낌이었다. 시내는 여러 명이 돌아다니는 것보다 혼자 다니며 가고 싶은 곳을 다 들리는 것이 편하다. ‘무조건 많이!’ 를 외쳤던 커피 위 휘핑크림은 니글니글한 느낌이고, 이제는 캬라멜마끼야또가 아닌 아메리카노를 더 좋아한다.

 

이처럼 별거 아닌 것 같은 나의 취향을 따져보게 된 계기는 하람 작가의 에세이 <그나저나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세요?> 때문이다. 책의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말한다.

 


일상 속에서 좋아하는 것을 발견해 기록하면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훨씬 더 아름다워지는 기분이 들었고, 이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했다. 독서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표정, 출근길 버스 안에 흐르는 올드 팝송, 케이크와 꽃을 든 누군가의 뒷모습처럼 사소한 풍경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별한 장면이 된다.

정성 어린 시선으로 일상을 관찰하고 좋아하는 것을 틈틈이 기록하다 보면 다채로워지는 삶을 만날 수 있다.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주변을 돌아보지 않아 모르고 지나친, 어쩌면 영원히 몰랐을 찰나의 순간을 오늘 발견한 행복으로 기록한다. 일상 속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남긴 저자처럼 당신도 찬찬히 산책하듯 좋아하는 것들을 살펴보면 어떨까.



나 스스로를 여태껏 이리저리 휩쓸려 사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저 문장은 마치 넓은 바다를 유영하는 나를 구조하러 온 구조선 같은 느낌이었다. 하루하루 새로운 나를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5년 동안 사용한 다이어리를 다시 읽어보니 반복되는 패턴도 보였다. 기록할 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사실들이었다.


물론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꼭 휴학하고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꼭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란다. 내가 알고 있던 ‘나’ 는 실제 ‘나’와 많이 다를 수 있다.

 

 

 

슬기로운 휴학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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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7월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니 이 글이 기고 될 즘이면 7월도 끝자락에 접어들 것이다. 외국어 공부, 아르바이트, 대외활동, 여행 같은 것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난 계절들은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나’ 라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많이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값진 시간이었다. 에디터 활동이 마무리될 즈음, 한 번 더 같은 주제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올해 초의 내가 지금의 나를 상상하지 못했 듯, 4개월 뒤의 나는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있길.



[김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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