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성문의 위엄을 등에 업고 생활하기 [전통예술]

글 입력 2019.07.0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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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교외가 점차 발전해감에 따라 도시의 경계를 구분 짓기 모호해진 현대 이전에 도시를 다른 지역과 구분하는 것은 성벽의 역할이었다. 성벽은 전 세계의 도시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는 건축물로 현재는 해당 지역의 문화재로서 과거의 위상을 뽐내고 있다.


성벽은 방어 목적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교류와 생활, 더불어 성내(城內)라는 위엄을 드높이는 기능을 한다. 그만큼 성의 내부와 외부를 드나드는 과정은 철저해야 한다. 사극을 보면 종종 도성 내부를 빠져나가거나 진입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고 실행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성문을 지키는 수문군(守門軍)의 감시를 몰래 피해 통과하는 그 순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준다.


그렇다면 한양도성의 여덟 성문 출입을 어떻게 관리했을까?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기록 자료로 본 한양도성 Ⅲ 성문개폐>를 방문하였다. 성문 관리에는 계절에 따른 자연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등 엄격한 방식을 볼 수 있었던 한편으로 기록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 또한 엿볼 수 있었다.


 

 

자유로운 주간 통행의 이면



지금은 사라진 야간통행금지제도. 통행금지는 불안전한 치안을 이유로 실시되었다. 전등이 없었던 근대 이전에는 야간시간에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어 더욱 야간활동을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생각보다 통행금지제도는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초경3점(初更三點) 이후 5경3점(五更三點) 이전에 행순을 범하는 자는 모두 체포할 것”


- 『조선왕조실록』 1401년(태종 1) 5월

 

 

위의 기록으로 봤을 때 통행금지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으며 상당히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의 성문은 인정(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에 여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전해진다(초경 3점(初更三點)에 종이 28번 울리면 인정, 5경 3점(五更三點)에 종이 33번 울리면 파루이다. 초경 3점에서 5경 3점까지의 시간은 대략 오후 8시에서 오전 4시 반까지이다). 문을 여닫는 시기의 기준은 해가 일몰하는 시각을 기준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여름에는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열었고 겨울에는 개방 시간이 짧았다. 여기에서 성문개폐를 융통성 있게 조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계절(특히 여름과 겨울)마다 개방 시간을 조절한 이유는 주민들이 낮 동안 최대한 활동할 수 있도록 한 정책적 배려이다. 조선시대의 야간은 사실상 집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자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까지 주민들은 생산 및 소비 활동을 최대한 해야 했을 것이다. 야간에 급한 용무가 생겼을 경우에는 순관(巡官) 또는 경무소(警務所)에 신고하여 순관이나 경무소에서 사람을 시켜 통행증인 경첨(更籤)을 가지고 함께 목적지까지 연행한 이후 병조에 이를 보고해야 했다.


조선시대 야간통행 금지(1895) 이전까지 야간에 주로 외출을 하는 특정 집단이 있었다. 바로 여성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남녀유별사상에 따라 성별에 따른 통행에도 내외법(內外法)이 적용되었다. 따라서 양반과 상민층의 여성들은 낮 시간에는 집에 머물고 야외활동 사유가 생겼을 경우 주로 밤에 외출을 하였다.


도성 출입은 사람의 주요 활동 시간인 낮을 고려하여 도리 있게 시기에 따라 성문 폐쇄를 조절했지만, 그럼에도 해가 떠있는 때에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위에서의 ‘주민’의 범위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주민의 범위와는 다르다. 『경국대전』에는 일정 야간 시간을 제외한 성문이 열린 시간에는 대소인(大小人)이 활동할 수 있는 것처럼 명시되어 있다.(『경국대전』 병전 행순조(行巡條) “2경 후부터 5경 이전까지는 대소인원은 출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시대 유교사상에 입각한 전근대적인 시선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계로서의 성문


    

현재 한양도성 내부에 해당하는 종로구와 중구 일대는 실질적인 서울의 도심이다. 이 도심은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천도한 이후부터 쭉 명맥을 유지해왔다. 도시는 문명이 집약되는 곳인 만큼 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으나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선망의 장소가 되었다. 과거에는 고위계층이, 현대에는 고소득층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서울은 계급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 전환에 따른 기준만 달라졌지 도시 내부로 진입하는 장벽은 여전히 높다.

 

방어 목적과 더불어 다른 지역과의 경계를 설정하면서 차별화를 두는 물리적 실체가 성곽(城郭)이다. 특히, 성곽의 높이가 높을수록 주변 지역과 구별됨으로부터 나오는 위엄은 더 커진다. 한양도성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성곽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편이며 약 18km 길이의 둘레는 상당히 큰 규모이다.


한양도성의 존재가 알려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필자는 성내가 다른 나라의 수도보다 폐쇄적인 장소라고 보았다. 오늘날 런던 중심부(City of London) 외곽에 남아있는 런던 월(London Wall)을 살펴보자. 런던 월의 유래는 로마 제국의 Cladius 황제가 영국을 정복한 뒤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 템즈 강 주변의 Londinium 주위로 성곽을 쌓은 것이 시작이다. 런던 성곽은 18세기까지 유지되다가 도시가 확장되면서 허물어졌는데, 현재는 남은 성곽 일부가 도시 건축물과 공존하는 형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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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시내 곳곳에 남아있는 런던 월

 


보통의 도성은 도시가 확장되면 허물고 확장된 지역을 둘러싼 성벽을 다시 축조한다. 그러나 한양도성은 서울의 범위가 확장되어도 도성을 다시 쌓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다. 도성은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세워지는 성곽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도시의 범위가 넓어져도 성내 구역을 상당히 중시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예전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어떤 노인이 “나는 도성 내부에 살아.”라는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남들과는 다르게 모든 시설이 밀집된 곳에 산다는 말을 우회하여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산책로와 관광지가 된 도성은 아직까지도 도심과 그 외를 구분하는 대명사 역할을 하고 있다.


 

 

성문에 담긴 미시사



한양도성의 성문은 도성을 출입하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계층, 국적 구분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문 관리에 문제가 생길 경우 담당 수문군이나 업무를 방해한 자는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처벌받았다(성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은 자는 장(杖) 80대, 때가 아닌데 마음대로 여닫은 자는 장 100대, 부험을 받은 호군(護軍)으로서 야간 당직에 빠진 자는 장 60대와 도(徒) 1년에 처했다. 만약 성문의 자물쇠를 훔친 자가 있으면 그 범인에게는 태(苔) 100대와 종신 징역형을 내렸다.)


전시물 중 허가받지 않은 상태에서 폐쇄된 성문을 여는 것이 얼마나 힘들며 이에 따른 율법이 단호한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어젯밤 창의문(彰義門)에서 인정(人定) 후에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어떤 세 사람(유생 2명, 노비 1명)이 성 밖에서 들어와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며 문을 닫지 못하게 하여 시비가 붙었다. 이로 인해 자물쇠가 파손되어 문을 굳게 닫을 수 없었다.”


-『비변사등록』, 순조 13년(1813) 7월 9일


  

결국 창의문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창의문 부장과 수문군은 각각 곤장 60대를 친 후 충청도로 유배 보내졌으며, 행패를 부린 유생들은 곤장 100대에 처하였다.


『승정원일기』 등에서도 수문군의 부주의한 관리에 의하여 처벌을 받은 기록이 생각보다 자주 나왔다. 성문을 지정된 시간보다 이르게 혹은 늦게 열거나(『승정원일기』 헌종 7년(1841) 5월 21일) 경비 도중에 열쇠를 잃어버려 그 사건이 상부에 보고되는(『승정원일기』 순조 23년(1823) 8월 24일) 등 성문개폐와 관련된 사건은 상당히 다양했다.


성문 관리에 대한 형벌 규정만 봤을 때는 한양도성의 중요성을 파악하기에 조금 모호하였다. 그러나 실제 기록에 실린 예시를 보니 그 위상이 확실하게 다가왔다. 당시 국가적 기록에까지 담길 정도라면 인터넷 뉴스 사회면 주요 기사로 다룰 만큼의 중요성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대개 역사를 배울 때에는 전쟁 등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사건을 배우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작은 일들은 잘 알 수 없기 마련이다. 전시에서 보여준 기록들은 당시 생활 모습을 뚜렷하게 나타내주어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 속에 있었던 성문의 통행 방식을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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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박물관 2층의 작은 전시관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학교 수업으로 한양도성의 구조와 그 역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성 출입 규정과 그 중요성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전시회로 한양도성에 관한 지식을 보충할 수 있어서 상당히 유익했던 시간이었다.


근대 시기 전차 노선 확장을 위하여 성문 대신 성곽을 허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방어 측면에서는 성벽 보존이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한양도성의 문은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한양도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본다.


문은 구역 사이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문을 넘나든다는 행위도 경계를 넘는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현대에는 지역을 구분하는 상징물이 표지판 정도이다. 이동의 자유가 보장된 시대에서 성문개폐를 곧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과거 사람들이 성문을 넘는 데 이동의 제약을 슬기롭게 대처했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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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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