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끝없는 분열의 끝은 어디일까 - 연극 '결투' 리뷰 [공연]

감정과 관계가 거세된 세상
글 입력 2019.07.0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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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효의 친구가 되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 애는

끝없이 분열할 거예요.



우리는 끝도 없는 풍요와 빈곤의 아이러니 속에 살고 있다. 물질과 자본을 위해 여타의 가치는 가차 없이 희생되는 세상이 언제부터 인류에게 도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빈곤한 풍요의 늪에 빠져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바쁘게 돌아가는 지구 안에서 인간애, 나눔, 사랑, 배려와 같은 기본적 가치들은 거세되고, 효율적 움직임과 빠른 달리기에 온 시선이 집중된다. 이 무섭도록 효율적인 신자유주의의 끝은 어디일까.

유토피아와 같은 허구적 세계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많은 창작물에서 세계의 종말은 점점 더 현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현실적’, 정말 우리의 현재와 유사한 세계 속에서 죽음과 불, 운석 없이도 다분히 충격적인 종말을 묘사한다.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드러났던 허구적 리얼리티보다 한층 더 현실에 다가간 미래는 대부분 암울하다. 아니, 우리의 현실이 암울한 소설적 미래로 다가간다고 해야 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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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결투’ 역시 희극적이지만은 않은 미래를 그려내어 현실의 우리에게 일종의 경고 섞인 물음을 던진다.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본체와 분리체로 분열하기 시작한 인류, 그리고 효율적 관리를 위해 본체와 분리체 간 결투를 붙여 승리하는 쪽이 살아남도록 설계된 사회. 분열의 이유를 탐구하여 공존을 도모하는 것보다 개체수를 조절하는 쪽을 선택한 세상, 잔인하도록 냉철하다.



감정이 사라진 세상


인간을 인간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류를 발전시킨 것은 이들의 이성과 머리일지 몰라도 인류의 공동체를 유지시킨 건 머리보다 조금 아래에 위치한 감성과 정서가 아닐까 싶다. 사랑과 애정, 슬픔과 비애, 공감과 나눔, 인간들은 이러한 감정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손을 잡는다. 우리가 타인을 해하지 않는 이유는 투철한 준법정신 때문일 수도 있으나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게 되는 본능 탓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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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결투’의 세상에는 감정이 없다. 무감각은 분열을 겪지 않는 소수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저 무던하게, 상대가 약속 시간에 늦어도 굳이 이유를 캐묻지 않는 둥글둥글한 사람들만이 분열하지 않는다. 분열을 겪지 않았던 결투장 관리인 ‘나’ 역시 이런 부류의 사람인데, ‘나’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묘사한다.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날카로운 모서리에 긁힐 일은 없지만 영원히 남과 모서리를 맞댈 수도 없는 그런 사람.

반면 최은효는 다르다. 그는 끝없이 분열하는 사람에 속한다. 하지만 그가 묘사하는 분열체는 악의 집합체 ‘하이드’라기보다 선의 집합체에 가깝다. 남의 고통에 공감하고, 지극히 정의적으로 살아가는, 어쩌면 이 바쁜 현대 사회에서 눈치 없고 융통성 없다는 힐난을 받을 만큼 올곧게 사는 사람(?)이다. 최은효의 마음 어딘가에 숨어있던 양심과 선이 똘똘 뭉쳐 새로 태어난 것만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은효의 분리체는 결투에서 패한다. 마치 이 생태계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가동된 것처럼, 분리체는 결투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어느 날 최은효의 분리체는 결투 직전, ‘나’에게 최은효의 전화번호를 건네며 친구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어쩌면 인간들이 분열하는 이유는 관계에 대한 갈망 탓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최소한의 감정과 최소한의 인간관계가 주는 결핍을 스스로 해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야말로 너무나 잔인한 디스토피아다.



분열이 낯설지 않은 이유


우리의 현재는 과연 분열로부터 자유로울까. 감정과 관계는 점차 흐릿해지고, 나의 세계는 조금씩 줄어들어 이젠 나의 발 외에 타인의 걸음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크지 않다. 관계망이 넓어질수록 진정한 ‘관계’ 그 자체는 줄어드는 모순이 바로 21세기 현재가 아닐까 싶다. 그 과정에서 감정과 감성 또한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몇 년 전부터 인터넷상에서 ‘오글거린다’라는 말이 파도처럼 번졌다. 물론 온갖 특이한 글자를 조합해 제 불행의 전시회를 여는 것은 조금 ‘오글’거리기도 하지만, 이제는 문학의 문장과 플롯에도 ‘오글거린다’라는 딱지가 붙고 있다는 게 문제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소비하는 것, 공유하는 행위 자체를 오글거림으로 치부하여 값싸고 어린 푸념으로 전락되는 과정이 과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크기변환]감성.JPG
구글 '감성' 검색 결과


흥미로운 것은 ‘오글거림’과 ‘감성적인 문장’이 동시에 유행을 탄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시의 한 구절이나 한 행을 예쁜 사진과 함께 SNS에 올리면 다른 누군가가 그 시의 구절과 예쁜 사진을 타인과 공유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행위 자체가 오글거린다며 혀를 찬다. ‘결투’의 분열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이런 모순적 현실에 있다.

시의 구절을 인용해 그 시의 분위기와 시인의 메시지와는 별개로 새로운 감성적 분위기를 도출하는 것은 문학을 즐기는 행위라기보다 감성을 갈구하는 행위에 가깝다. 점점 ‘우리’보다 ‘나’가 중요해지는 세상에서 감성과 감정은 조금씩 밀려나는 추세고, 이에 따라 인간관계 역시 뒷걸음치고 있다.

감정과 관계가 자연선택에서 밀리는 세상이 오기 전에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하는 시기다. 오글거림, 그 너머에 있는 정서를 붙잡기 위해서. 그리고 이 끝없는 분열을 이겨내 오롯한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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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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