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줄리엣과 필립과 올리버에게 [문화 전반]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프라이드> 그리고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
글 입력 2019.07.0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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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프라이드>와

<줄리엣과 줄리엣>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이름이 같은 두 소녀가 서로 사랑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안다. 정말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


이건 지어낸 이야기다. 나도 안다. 내가 지어냈으니까.



한국 공연계, 특히 연극과 뮤지컬에 성 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제법 많다. 벌써 10주년이 넘은 뮤지컬 ‘쓰릴미’나 매번 매진되는 뮤지컬 ‘헤드윅’, 꾸준히 올라오는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까지 모두 성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성 동성애자의 사랑을 다룬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극의 조연 캐릭터조차 여성 동성애자 캐릭터는 극히 드물다. 애초에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공연이 드문 탓이다.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은 그런 점에서 매우 독특한 공연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정상 시 되는” 이성애 이야기를 동성애 이야기로, 그것도 두 여성 주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사실 ‘줄리엣과 줄리엣’은 이번에 처음 본 것이 아니다. 초연이 올라왔을 때 주변에서 유명세를 전해 들었고 앵콜 공연이 진행될 때 운 좋게 관람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오후 8시. 지금 이 순간에도 환기가 잘 안 되는 지하에 위치해 습습한 산울림 소극장의 공기가 코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산울림의 공기와 매우 잘 어울리는 극이었다. 극이 절정으로 향해가는 동안 내 얼굴에 비가 내렸고, 극이 끝나자 무지개가 하나 피어났다. 교리를 인종차별의 근거로 사용하는 종교에 대한 비판도 적절히 들어있었고, 이해한다고 포장해도 결국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해 주인공에게 상처를 주는 가족과 동성애를 더럽고 추잡하게 인식하는 세간의 시선까지 현실을 적절하게 잘 표현했다.


그중에 가장 좋은 부분은 사람들이 아무리 줄리엣과 줄리엣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바꿔 성  소수자를 지우려고 한들 우리는 지워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을 거라는 메세지였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공연장 내부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줄리엣과 줄리엣을 보면서 나 또한 그들이 마냥 행복해지기만을 빌었다. 고전을 현대에 올릴 때에 이 공연이 현대에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왜 꼭 이 공연을 지금 이 시대에 올려야 하는지 대한 고찰을 넣어 각색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줄리엣과 줄리엣’은 이런 부분에서 가장 적절하게 각색해 만든 공연이었다.


그리고 2019년, 나는 또 다시 ‘줄리엣과 줄리엣’을 보러 갔다. 그때의 기억이 강렬해서 한 번은 더 보고 싶던 차에 마침 재연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공연장이 바뀐 탓인지 다소 어수선한 감이 있었으나 내용 면에서는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저번에 공연을 관람했을 때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공연, 연극 ‘프라이드’의 58년도와 참 닮았다.



줄리엣과 줄리엣.jpg
 

연극 ‘프라이드’는 2008년과 1958년을 번갈아 가며 동명의 올리버, 필립, 그리고 실비아라는 세 인물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과거 동성애를 배척했던 현실과 현대 동성애에 대한 인식을 잘 드러내는 공연이다.


그중 58년도 필립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여성인 실비아와 결혼한다. 필립은 실비아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결혼 생활은 점점 불행해진다. 어느 날, 실비아는 그의 직장 동료인 올리버를 집에 초대한다. 집에 초대된 올리버와 필립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올리버는 자신의 성 정체성,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필립을 사랑한다고 솔직하게 말하지만, 필립은 끝까지 자신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과 같은, “정상”처럼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숨기고 감춘다. 결국 필립은 동성애를 병이라 판단하고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병원에서는 동성애를 오직 섹슈얼 적인 성애로만 판단하며 그가 올리버와 마음이 닿아 느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다.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이 195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처럼 다소 시대에 맞지 않고 편견에 사로잡힌 극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극 중 줄리엣과 줄리엣은 58년도의 올리버처럼 자신의 성 정체성에 어떤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그저 이름이 나와 같은 줄리엣이란 사람을 사랑할 뿐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의 시선은 다르다. 줄리엣 몬테규의 동생 로미오 몬테규는 줄리엣을 가족 중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진실하고 숭고한 결혼은 사이비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장난 놀음으로, 아늑한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살겠다는 소박한 꿈은 가족 생각도 하지 않고 생각하는 허황한 망상으로. 가장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그를 무시하고 비난하던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줄리엣은 큰 상처를 받는다. 줄리엣은 울면서 말한다.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 미안하다고.


줄리엣 캐풀렛의 오빠와 아버지는 그를 보석처럼 사랑한다. 오빠와 아버지가 모르는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했을 때는 남성을 용기 있고 사랑을 쟁취할 줄 아는 젊은이라 칭송하면서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거짓말을 하지 말라거나 차마 입으로 내뱉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줄리엣을 위한다는 말로 포장하며 그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시키기 위해 준비한다. 줄리엣이 가장 믿고 따르는, 친 자매 같던 유모 역시 더 이상은 안 되겠다며 줄리엣 자신의 마음이 아닌 가족의 말을 따르라 한다.


58년도의 필립 주변에는 줄리엣과 줄리엣 주변에 있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기도 전에 그런 주변에 동화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숨기고 감추고 두려워하고 역겹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욕했을 것이다. 단지 성이 같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줄리엣과 줄리엣은 1958년에 갇힌다.



줄리엣과 줄리엣 2.jpg
 

연극 ‘프라이드’는 2017년까지만 해도 08년도 필립과 올리버, 실비아의 이야기를 공연이 진행되는 해의 숫자로 바꿔 2017년도 이야기, 2014년도 이야기 등으로 공연했다. 그러나 2008년의 이야기를 2019년의 이야기로 바꾸기에는 약 10년 동안 변화가 참 많았다.


올리버에게 잡지에 쓸 글을 문의하는 편집장은 성 소수자인 삼촌이 있었다며 자신이 퀴어 프렌들리한 사람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이성애자 남성을 위한 동성애자의 거리 섹스에 대한 칼럼을 맡기거나 자기 친구가 외국에서 트렌스젠더와 섹스를 했는데 좋았다고 말했다는 둥 이야기는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보이고 자신과 동성애자를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비록 다른 배우긴 하나 2017년도에 보았던 ‘프라이드’에서 이 잡지의 편집장 역의 배우가 매우 진중하고 차분한 투로 연기했는데, 2019년도에는 다소 시건방지고 껄렁한 투로 대사를 읊었다. 말하는 투의 변화로 2017년도에는 뭔가 이상하지만 편집장이 맞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2019년도에는 편집장의 말이 꼭 옳은 말,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08년도는 58년도에 비해 성 소수자를 비롯한 인권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지만 19년도에 비하면 부족한 감이 있는 것이다.


비단 08년도의 이야기뿐 아니라 58년도의 이야기에서 필립이 올리버를 강간하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던 2017년 ‘프라이드’와 다르게 강간하려다 멈추고 대사를 치는 것으로 바꾸며 자극적인 장면을 최대한 축소한 것도 2년동안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제작진도 관객도 이를 인지하는 상황에서 19년도 이야기 대신 08년도 이야기로 바꾼 것은 당연하다. 2017년에 이어 ‘프라이드’를 보며 가장 크게 바뀐 부분이 관객과 제작사의 인권 감수성이 높아진 부분이라 느껴졌다. 나 자신조차도 2017년과 2019년의 생각이 조금 바뀐 터였다.



PRIDE_포스터.jpg
 


전세계에서 매년 5월과 6월 사이 퀴어 퍼레이드가 열린다. 프라이드 퍼레이드라고도 하는 이 퍼레이드는 성 소수자의 자긍심을 높이고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행진하는 행사다. 한국에서는 2000년부터 매년 여름 퀴어 문화 축제를 벌이고 있다. 서울에서 시작했던 축제가 대구와 전주, 제주, 부산 등에서도 열리며 확산되고 있다. 최근 몇 년, 한국 퀴어 문화 축제가 열릴 때면 거의 항상, 반동성애 집단이 동성애 축제를 반대하는 의미로 맞불 집회 등을 벌이며 축제를 방해한다. 반동성애 집단에 가담하는 사람의 주변에도 올리버와 필립, 줄리엣과 줄리엣이 존재할 것이다. 두려워 스스로를 숨기거나 주변이 그들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2017년도에 비해 인권 감수성이 많이 높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맞불 집회를 보고 있자면, 한국은 성 소수자의 인권이 공연 속 58년도의 인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줄리엣과 줄리엣’이 현대 한국에서 쓰인 이유가 명확하게 나온다. 08년도 이야기조차 다소 낡은 시대는, 사실 누군가에게는 58년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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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공연이란 희곡과 별개로 올려지는 당시의 시대를 반영한다. 2017년 ‘프라이드’에서 직접적으로 강간을 표현하던 장면이 2019년도에 삭제되고, 2018년 ‘줄리엣과 줄리엣’에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줄리엣 카풀렛의 오빠가 줄리엣 몬테규의 목을 조르던 장면이 2019년도에 삭제된 것처럼 공연은 아주 느리게 조금씩 바뀌는 시대를 닮아 변해간다. “동성애자에 대해 어떤 편견도 없지만 나는, 그리고 내 주변에는 동성애자가 없다”며 그들은 나와 ‘다른’ 존재라고 말하는, 로미오 몬테규 같은 사람이 사실 존재하는 성 소수자를 숨기고 있다며 비난하는 실비아의 목소리가 은연중에 성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람에게 그조차도 옳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이 글의 맨 첫 부분에 인용한 글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해 ‘줄리엣과 줄리엣’을 쓴 한송희 작가님의 글에서 인용했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런데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정말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어낸 이야기인데 모두 있었던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줄리엣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자신이 누구인지 고백할 것을 고민하고, 연인과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본인의 존재를 부정하고 억압하는 이들과 마주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로맨스를 멋대로 바꿔버린 이 이야기가 줄리엣들의 친구가 될 수 있길. 무엇도 당신들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하는 작은 응원이 되길.



58년도의 필립은 자신을 부정했으나 올리버는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았고 실비아는 이들이 이들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응원한다. 줄리엣과 줄리엣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살기 위해 집을 구하고 도망 칠 궁리를 하는 둥 끊임없이 발버둥을 친다. 이들의 발버둥이 모여 하나의 행진이 되고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의 성 정체성은 후에 그들의 프라이드, 자긍심이 된다.


그러니 현대를 살아가는 필립, 올리버, 줄리엣에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당신의 현대가 58년도인지, 08년도인지, 19년도인지 당신의 주변이 줄리엣의 가족과 같은지, 실비아와 같은지 알 수는 없으나, 누군가는 끊임없이 싸우고, 버둥 치고 있기에, 다 괜찮다고. 우리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니 우리를 숨기지 말고 프라이드를 가져도 된다고.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내가 나에게 닿을 때까지.
 


[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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