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에 관해서

글 입력 2019.06.27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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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셰핑과 The Volunteers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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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스웨덴에서 살던 때에 혼자 바르샤바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발단은 이러했다. 내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바르샤바 필하모닉과 협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티켓을 결제해버렸다. 그러고는 비행기를 알아보는데 웬걸, 스톡홀름에서 바르샤바까지 왕복 5만원이면 되는 티켓이 있었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갔다 오는 것도 족히 9만원은 드는데, 5만원이라니! 이건 신이 주신 기회라 여기며 냉큼 비행기 티켓까지 샀다. 그러나 늘 그렇듯 급하게 해치워버린 무언가는 탈이 나기 마련이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에서야 스톡홀름에는 공항이 3개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가야 하는 스카브스타 공항은 이름에만 스톡홀름이 들어갔을 뿐, 아주 작고 외진 곳에 있어서 그곳까지 가기 위해서 기차를 5번이나 갈아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연착이 많아 속을 썩이는 스웨덴 기차인데 환승을 5번이나 해야 한다니. 그렇게 비행기 값 몇 만원 아껴보려다가 긴장감 넘치는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도 스웨덴을 떠나온 지 반년 정도 된 지금, 누군가 어떤 게 기억에 남았냐고 물어본다면, 애증의 스톡홀름 스카브스타 공항에서 내가 살던 동네 벡훼로 돌아오기까지 길고 길었던 혼자만의 여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스카브스타 공항 – 니셰핑 – 콜모어덴 – 노르셰핑 – 묄비 – 알베스타 – 벡훼까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스웨덴의 갖가지 도시들을 거쳐 오면서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으며, 다시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마주했다.

그날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스웨덴어를 못하는 내게 영어는 괜찮냐며 복잡한 환승 방법을 설명해주던 승무원, 표지판이 없는 버스정류장에서 어리둥절하게 있을 때 유쾌하게 버스 문을 열어줬던 버스 아저씨, 기차에서 만났던 당찬 꼬마와 내게 과자를 나눠줬던 꼬마의 가족들. 고되고 지치는 12시간 속에는 스웨덴 사람들의 따뜻함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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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좋았던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노르셰핑에서의 50분이었다. 보통 환승 시간은 짧으면 10분, 길어도 20분 정도였는데 유독 노르셰핑에서만 50분이라는 꽤 긴 대기시간을 보내야 했다. 역에 앉아있으면 뭐 하나 싶어서 배낭을 메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때를 함께 했던 노래가 바로 The Volunteers의 <S.A.D>였다.

50분의 시간도 갑자기 주어졌고, 노르셰핑이라는 도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그저 마음이 닿는 대로 걸었다. 여행으로 갔다면 구글맵을 뚫어져라 확인하며 다녔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던지라 덕분에 계획에 없던 노르셰핑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는 노르셰핑의 길을 The Volunteers의 짱짱한 밴드 음악과 함께 걸으니 꼭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 전혀 알지 못하는 장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하지 않은 마음, 무엇보다 정말 어디에도 제약받지 않고 그곳을 돌아다닌 나. 나를 향한 눈들도 별로 없고, 설령 누군가가 있다 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곳. 그래서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흥에 겨우면 리듬을 타기도 하고, 갑자기 행복감이 밀려와서 이유 없이 미소를 짓기도 했다. 또 걷다보니 나온 강을 따라 걷다가 거울처럼 또렷하게 풍경을 비추는 물을 한참 바라보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서 쨍한 주황색의 트램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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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무언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서울에 돌아온 뒤에 유난히 그때의 시간들이 자주 떠오른다. 늘 목적이 있어서 어딘가를 향했는데, 언제나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을 찾았던 나였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어딘가를 활보한다는 게 생각보다 큰 쾌감을 줬던 것 같다. 정말 별 것 아니지만 이전의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라 더 특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준 것에는 자잘한 생각이 나지 않게끔 사운드를 가득 채워준 The Volunteers의 노래 덕택도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도 문득, 그때의 자유로움이 그리울 때면 어김없이 <S.A.D>를 듣는다. 쏟아지는 할 일에 숨이 막힐 때, 가끔 지긋지긋한 감정이 솟아오를 때, 잡스러운 고민들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때, 손에 잡고 있던 모든 걸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들으면서 목적이나 이유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그저 걷는다. 그렇게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고 노래를 듣다 보면 이리저리 엉킨 무언가들이 자연스레 풀어진다. 내가 가장 복잡해지는 순간, 나를 단순하고 가볍게 되돌려주는 기억은 그렇게 그들의 노래와 연결되어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시간, 내가 사랑하는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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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6월 초여름의 밤, 30도를 웃도는 낮의 더위와 찝찝함과는 달리 선선함이 온몸을 감싸는 시간이 찾아온다. 내가 반팔 옷을 입건 긴팔 옷을 입건 상관없는, 계절의 경계에 있는 그 날씨를 사랑한다. 기분 좋은 선선함 속에서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어둠에 짙어진 초록 나무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그것만큼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없다.

올해 휴학을 하고 학교 기숙사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동네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사한 집 주변은 그렇게 시끄럽지도 않고, 적당히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며, 단골이 될 만한 카페가 몇 있는 곳으로, 내가 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그리고 이 동네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한강’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걸어서는 15분 정도, 자전거를 타면 7분이면 도착하는데, 일주일에 3번 이상은 밤 산책을 가곤 했다.

하루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으로 추적추적 비가 떨어지는데도 우산을 들고 한강으로 향했고, 또 다른 하루는 해가 지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할 일을 전부 내려놓고 한강으로 달려갔다. 기분이 좋은 날이든 그렇지 않은 날이든, 지난 4개월의 대부분은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혹은 아무런 이유 없이 한강으로 향했다.

그래서 사실 최근의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혼자서 한강을 걷거나,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멍하니 노래를 들으며 앉아있거나, 했던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중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면, 단연 초여름의 매력을 느껴버린 6월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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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꽤 늦은 시간, 왜 갑자기 집을 나섰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따릉이를 빌려 타고 무작정 한강으로 향했다. 그날 해가 질 쯤 잠깐 내린 비 때문이었는지 어두운 밤하늘이었지만 청명했다. 그래서 또렷하게 밝은 달과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잔잔히 스치는 시원한 바람과 적당히 촉촉한 땅은 그날따라 나의 모든 걸 가볍게 만들었다. 피곤에 절은 몸, 무거운 생각들, 크고 작은 걱정들까지도.

망원한강공원에서 시작해 양화대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사실 이 둘 사이의 길은 내가 한강의 어떠한 곳보다도 사랑하는 곳이다. 초반에는 넓은 한강이 빛을 머금으며 일렁이는 모습과 그 너머 서울의 불빛들이 작게 반짝이는 풍경을 보면서 달린다. 늘 빽빽함 속에 묻힌 일상에서 이렇게 탁 트인 곳을 달리는 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꽤 큰 해방감을 주곤 한다. 그렇게 한강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달리다 보면, 양옆이 우거진 나무로 둘러싸인 길이 시작된다. 이곳에서는 내가 풀냄새를 맡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무성한 나뭇잎들이 흔들리면서 초록의 향기를 코에 가져다 댄다. 천천히 달리면서 위를 바라보면, 점점 초록이 짙어지는 초여름의 나무가 어둠에 싸여 흔들리고, 그 뒤로는 오묘한 검푸른 밤하늘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같은 어둠 속 다른 색의 대비를 바라보면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비 온 뒤 초여름 6월의 어느 날, 12시가 넘은 시각. 이는 우리 곁에 그리 오래 머무는 날씨가 아니기에 더욱 더 소중하다. 익숙하게 걸었던 길을 특별하게 만들고,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사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날씨.

가끔은 붙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일상에서 누군가가 나를 똑 떼어서 잠깐 다른 시공간에 놔줬으면 할 때가 있다. 잠깐 전혀 다른 세상에 갔다 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는 늘 상상에만 그치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크고 작은 우연들이 겹쳐 만들어진 그날의 날씨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선선한 바람 조금, 스치는 나뭇잎 소리 조금, 바닥의 촉촉함도 조금. 수많은 ‘조금’들은 가장 담백하고 단순하게 나를 밀어 올려 주었다.




[김윤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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