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행의 이유, 삶의 이유 [도서]

김영하 작가의 산문 <여행의 이유>
글 입력 2019.06.2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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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행이라는 건 일상의 지겨움과 복잡스러움을 벗어나기 위해 떠나는 거라고 항상 생각해왔는데, 막상 떠나온 여행은 일상보다 복잡하고 피곤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그 여행이라는 감정에 빠져 다시금 그것으로 빠져버리고 싶어지는 것 같다.


그의 신작, 에세이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이,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모국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이제 그 언어의 사소한 뉘앙스와 기색, 기미와 정취, 발화자의 숨은 의도를 너무 잘 감지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진정한 고요와 안식을 누리기 어려워졌다. 모국어가 때로 나를 할퀴고, 상처내고, 고문하기도 한다. 모국어를 다루는 것이 나의 일이지만, 그렇다고 늘 편안하다는 뜻은 아니다.


- 본문 p. 80



이 글만 보더라도 김영하 작가가 여행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저 여행지를 소개하고 그곳에서 먹었던 음식을 나열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것이 그가 이제껏 써왔던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출간했지만, 이전의 책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 이유이다. 소설에는 그가 만든 세상과 인물이 있지만 에세이에는 없을 뿐이다. 다만 그만의 이야기가 있다. 살아온 역사와 여행을 통해 느낀 감정,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다시 돌아와 생각해보니 얻을 수 있었던 인생의 깨달음. 그러한 것들이 가득 담긴 이야기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자서전으로 읽혔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장 좋았던 것은 여행을 대하는 작가의 방식 그 자체가 아닐까. 그는 일생동안 수많은 여행을 했지만 드라마틱한 변화와 다채로운 영감 거리를 기대하며 비행기에 올라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비행기에 올라타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결과로 보았다.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그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자 안식을 얻게 되는 방식. 삶에 대한 통제력을 스스로 확인하는 방법. 이러한 독특한 발상은 오랜 세월이 누적된 작가의 삶의 방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롭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많은 이주를 거치며 이곳저곳을 살아왔다. 육 년 동안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옮겨 다니며 무려 여섯 번의 전학을 했다. 그를 통해 작가가 느낀 것은, 아무리 좋은 인연이라도 언젠가는 헤어지게 된다는 것,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이별을 하게 되고, 또 다른 환경에 맞게 적응해나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계속해서 짧은 텀으로 반복된다는 것. 그 반복의 굴레의 한 가운데에 놓인 어린 날의 작가는 어쩌면 삶이란 반복되는 여행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린 날의 기억은 우리도 모르는 새 어른이 되어서까지 크나큰 영향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서 '프로그램'을 언급한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같은 고정관념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백인은 어쩌다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룬 흑인을 만나면 '흑인이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대사를 칭찬이랍시고 치게 된다. (...) 더 넓게 보자면 '프로그램'이란, 인물 자신도 잘 모르면서 하게 되는 사고나 행동의 습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본문 p. 58



이러한 프로그램은 어릴 적 경험과 사건들을 거치면서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 자유 의지대로 스스로가 움직이고 사고한다고 믿지만, 실은 이런 무의식이 본인이라는 사람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어릴 적의 잦은 이주와 짧게 지속되는 인연의 경험들이 작가를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잦은 이주의 경험이 익숙해진 작가의 버릇같은 행동만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낯선 곳에서 얻게 되는 환영받아들여짐을 통해 또다시 안도감을 얻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남은 삶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이다.


비행기를 타고 모국어가 아닌 곳에 도착해 처음 보는 사람들과 처음 보는 간판들을 지나쳐 처음 보는 호텔에 도착하면 낯선 만물들 틈에서 홀로 익숙한 나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에서 1차 안정감을 느낀다. 호텔 직원이자 현지인의 환영을 받으며 낯선 방에 도착해 짐을 풀고 깨끗한 침대에 누우면 나는 다시 이곳에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안도감이 그를 계속해서 여행으로 부추기는 것이다. 다시 이곳에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 동시에 새로운 곳에 적응하게 됐다는 안도감. 즉 어릴 적부터 자주 이사를 하며 느꼈던 바로 그 감정.


'새로운 이곳에 적응하고 싶다.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이와 같은 감정을 다시금 얻게 되는 것이다. 어릴 적의 전부였던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경험. 그것이 작가로서는 여행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은 작가 본인도 책을 쓰는 도중에 어릴 적 모습을 회상하며 깨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삶이란 참, 눈을 감을 때까지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여행은 조금 다르다. 나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맡게 되는 그 도시만의 공기와 냄새를 맡는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자유를 느낀다. 사실 알아차릴 필요 자체가 없을지도. 며칠 후면 나는 여기를 떠난다.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잘 보일 사람도 없다. 그것에서 해방감을 느낀다.


해야 할 일은 거리도 마음도 멀어졌고, 오직 이 여행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된다. 물론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길을 잃거나, 계획이 틀어지거나, 날씨가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어떠한가. 나에게는 돌아갈 숙소가 있고, 모국어를 사용하는 친구들이 있고, 환전한 돈이 있다. 해야 될 일도, 참견할 사람도 없다. 이곳에서는 나를 아무도 모른다. 그것에서 자유를 느낀다.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은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생각하도록 만든다. 내가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던 무의식의 무게를 실제로 확인한 느낌이다. 나의 '프로그램'은 무엇일까. 어떠한 경험들을 통해 무의식을 이루어 나만의 프로그램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과 내가 혐오하는 나의 모습도 내가 모르는 프로그램을 통해 짜여진 것일까. 아마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프로그램은 어떤 원인과 결과로서 존재하고 있을까. 내 어릴 적 경험들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지만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겠다.


시간이 흘러 내가 나의 삶을 조금은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아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시간이 지나고 과거의 나날을 살펴보면 아득하지만 좋았던 기억들로만 반짝이듯이. 나의 어릴 적 아픔과 상처, 그로 인해 삐걱거리는 프로그램도 안쓰럽지만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리고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무의식으로 물감이 칠해진 나의 색깔도 동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 그리고 똑바로 대면한다는 사실은 나 자신을 인정했다는 의미이고, 나 자신을 인정했다면 나의 본모습까지도 사랑해줄 수 있겠다.


김영하 작가가 소개하는 여행의 여정이란,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는 분명 아니다. 여행이란 어쩌면 일상에서와 똑같은 몸과 정신을 지니고 새로운 환경으로 나를 던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틱한 행운이 나를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하고 길을 나선다면 분명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찾아와 눈앞의 풍경을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하지만 여행은 분명히 무언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적어도 여행을 하는 순간만큼은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내가 지금 무엇도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 본문 p. 205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이 문장이 나에게 힘이 된다. 이 여정이 하나의 여행이라면, 적어도 나는 정체되어 있지 않을 테니까. 지금 느끼는 이 감정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서 힘이 나고 때로는 소중해진다.


삶이라는 여행에 있어서 어떤 일이 닥쳐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겁이 나는 이유는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고, 막상 지나온 경험들은 한 켠의 추억으로 남게 될 뿐이다. 그저 현재에 충실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일상의 여정에서 이 책을 자주 꺼내 보며 작가가 들려주는 여행의 이유를 다시금 곱씹어보고 싶다. 그것은 나의 일상 속에서 잊혀졌던 여행의 감정을 곱씹어주게 함과 동시에 다시 살아갈 이유를 제시해준다.


우리가 지금 삶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눈물 나게 행복하더라도, 동시에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여행임이 분명하다. 언젠가는 떠나갈 현재를 지금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사실 떠나고 싶게 만드는 작품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다시 돌아와도 괜찮다고. 일상으로 돌아와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심지어 잘 못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책은 많지 않기에. 더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김영하 작가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 그는 에세이도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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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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