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모두에게 주어진 사랑의 기회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다시 생각하며
글 입력 2019.06.22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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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랑하라 한번도 사랑받지 않은 것처럼'에는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첫눈에 반한 사랑' 시가 실려있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둘 다 믿고 있다. 갑작스런 열정이 자신들을 묶어 주었다고. 그런 확신은 아름답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은 더 아름답다'.

그 의심은 이러하다.

'그러나 거리에서, 계단에서, 복도에서 들었던 말들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수만 번 서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 확신한 두 남녀가 사실은 지금 사랑에 빠지기 위해 과거의 일들과 엮어짐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지금이 있기 위해 과거가 존재했고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설렘을 가져다준다. 올해 최근에 접한 이 시의 내용은 작년 봄에 마주한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떠올리게 했다. 총 러닝타임 1시간 45분동안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로만 오롯이 구성된 '비포 선라이즈'는 신선함 그 자체였다. 흔히들 말하는 로맨스 영화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어떠한 공통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특수한 환경설정도 없었다. 둘 사이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방해하는 주변인물이나 역경도 없었다. 오직 이 영화는 우연에서 시작해 우연을 기대하며 끝을 맺는다.

위의 언급한 시 '첫눈에 반한 사랑'에서 시 속에 등장하는 화자인 '그들'은 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같이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갑작스런 열정, 즉 사랑이 그들에게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연한 만남, 우연한 감정이 진지한 만남, 감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점이 바로 영화 '비포 선라이즈'다. 영화는 현실에서 관객들이 한번쯤은 꿈꿔와봤을 우연을 가장한 사랑이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에서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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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와 셀린느는 각각 도착하는 목적지가 달랐지만 그 방향이 같았던 기차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민폐 손님의 행패로 불쾌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제시에게 셀린느의 등장은 자신의 착잡한 감정을 버려버리고 싶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우연히 만났다. 지극히 둘 다 개인적 목적이 있는 채로 향하는 기차칸에서 말이다. 처음 그들의 대화는 밋밋했다. 그러나 계속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러다 공통점을 발견한다. 바로 이 대화가 통하는 주제를 발견한 두 사람은 그것을 계기로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우연을 가장했지만 서로의 삶이 엄연히 존재했기에 그들의 만남은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서로의 성장배경과 경험했던 것을 토대로 축적한 가치관이 너무나 달랐기에 대화는 자연스러웠다. 흔히들 사랑에 빠지는 건 서로의 공통된 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장소에서 보내는 시간이나 같은 경험을 해보았거나 같은 취미를 가진 여부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동일한 점이 서로에게 필요충분조건으로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의 대화에서 오는 감정이 동일하는데서 출발한다. 이는 어떠한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대화에서 얻는 감정은 오로지 둘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비포 대화 사진 2.jpg
 

그러므로 영화 비포선라이즈의 기차칸에서의 만남과 곧이어 비엔나 역에서 즉흥적으로 내려 서로를 알아가는 제시와 셀린느의 행보는 현실에서도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배경의 동일함이 아닌 대화의 동일함이 서로에게 있다면, 각자 축적한 경험이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이 대화를 나누기 위한 필연이 된다. 그 다음으로 서로가 가는 행보는 그들만의 즉흥적인 시간이다. 영화에서 연출한 비엔나 장면이 현실에서는 따로 만남을 가지고 어떠한 장소에서 만나는 것과 같은 연장선상이다. 서로의 대화가 너무나 즐겁기에 서로의 말 속에서 동등한 감정을 느낄 수 있기에 일상적인 작은 순간들이 모두 설렘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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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에서 비엔나에서의 하루를 보내는 동안 셀린느와 제시는 식탁에서 나란히 서로를 마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 전에 짧게 대화를 나눴는데 너무 멋있어, 맘을 뺏겼거든'

'어릴 적에 증조할머니 유령을 봤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때 반해버렸지 뭐야'

서로 사건을 겪고 역경을 극복하며 알아가다가 로맨틱한 장면도 하며 전개되어야 할 로맨스 영화에서 호감의 표시를 이렇게 일상적 언어로 하다니, 이는 극적인 것을 기대한 관람객이라면 맥이  빠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현실적으로 사랑하는 감정을 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두 남녀의 아름다운 대화이다.

러닝타임 동안 서로와 대화하는 제시와 셀린느를 보고 있으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가 생각이 난다. '단 하루, 사랑에 빠지기 충분한 시간' 그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단 하루, 서로의 대화에서 사랑이 판가름 난다.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 요소인 사람간의 대화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 외의 요소는 부차적인 것이다. 두 사람이 있는 장소가 어디든지, 두 사람의 현재 사회적 조건이 어떠하던지, 두 사람이 보낸 시간의 양은 중요치 않다. 우연한 단 하나의 만남에서 우연한 대화를 시작으로 서로의 경험을 풀어낼 수 있는가를 눈여겨보라 한다.

앞서 언급한 '첫눈에 반한 시'는 이렇게 끝맺음이 난다.

'모든 시작은 결국에는 다만 계속일 뿐. 운명의 책은 언제나 중간에서부터 펼쳐지는 것을'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느의 로맨스는 현실적인 우연으로 중간에 펼쳐진 책을 관람객에게 보여준다. 지금 사랑에 빠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현재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훗날 우연히 만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과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또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사람에게는 우연과 같은 만남이 현실에서 이어지고 있으니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사랑이라는 감정을 억지로 표현하지 않은 영화 '비포선라이즈'는 이처럼 사랑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은 대화라는 자연스러운 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생각나는 사람에게 과감히 권해 보고 싶다. 가서 얘기를 나눠보라고, 그럼 그 감정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되어 후의 행보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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