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았을때, 미술도, 예술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냥 미술도 예술도 아니다 라고 인정을 해버리니 마음이 편했다. 어떤 기록 같은 거였다. 하루 중 어떤 기록의 시간이라고 적어두었다.

<밤하늘>, pendrawing on a small note, 2019
인간의 감각의 범위는 너무나 좁다.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 이것들에 대한 우리의 한계는 너무나 크다. 우리는 너무 밝은 색도, 너무 어두운 색도 보지 못하고 너무 작은 소리도, 너무 큰 소리도 듣지 못한다.
느낄 수 있는 것도 너무 적다. 예를 들어 냄새로 무언가를 찾는다던가, 촉수로 주위에 무엇이 느낀다거나 하는 동물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로부터 나온 결론은, 무엇을 해도,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엄청 사소한 일이 아닌, 엄청 위대한 일이 아닌, 그 자체라는 것이다.
결론의 결론은, 그려낸 그림이나, 써 내려온 기록이 얼마나 멋진지 혹은 별로인지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그 순간만큼은 온 힘을 다해 집중하여 그 행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람>, pendrawing on a small note, 2019
나는 내가 뭐를 그려낼지 모르고 그리는게 좋다. 내가 모르는 나의 힘을 발견하는 시간이 좋다. 손이 가는 형태로 혹은 하루동안 떠오른 형상을 일단 그려놓는다. 그리고 그 속엔 어떤 선들로 채운다.
어떤 방향으로 선들이 나아가게 할 건지 정하고 내가 정한 방향으로 선들을 채워넣는다. 그 과정이 좋다. 빈 공간을 채우고자 선을 채울수록 빈 공간의 수는 늘어나게 된다. 채우려고 할수록 채워야 할 공간이 많아진다는 부분이 나의 작업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부분/ <기운>, pen on canvas, 1000x1400mm, 2019

부분/ <기운>, pen on canvas, 1000x1400mm, 2019
선들을 그리며 그것들을 바로 코앞에서 바라볼 때에는 혼란스럽기도 하고, 단지 눈 앞에 까맣게 칠해지고 있는 알 수 없는 무언가일 뿐이다. 허나, 중간중간 뒤로 물러나 그것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어놓은 방향성을 인지하게 된다. 단지 난맥(亂脈)과 같은 혼란스러운 선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바라본다는 이유만으로 방향성과 조형성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한 발자국 물러나 바라볼 용기마저 생기는 듯 하다.

<기운>, pen on canvas, 1000x1400mm,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