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비가 되지 못하고 죽어야 했던 번데기 - 오페라 나비부인 [공연]

나비는 잡아서 핀으로 꽂아 판자에 고정해두는 게 아냐
글 입력 2019.06.12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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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한 대상, 나비



나비부인의 원작 작품 이름은 국화 부인이고, 거기서 파생된 소설과 오페라가 나비 부인, 마담 버터플라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국화, 나비 모두 여성을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극 중에서도 핑커톤과 샤플레스가 초초상을 가녀리고 연약해서 부러질 것 같은 여성으로 표현한다.


참 역설적이게도, 나비는 자유로움의 상징이다. 어디 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며 꿀을 먹고 사는 것이 나비다. 나는 살면서 나비를 잡는 사람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우리 외할머니다. 외할머니의 시절에는 잠자리를 포함한 곤충을 잡아서 먹고는 했다고 한다. 아마 나를 포함한 할머니의 후세대 사람들은 그런 날아다니는 생물을 손으로 잡을 줄 모를 것이다.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보여준 초초상의 모습은 나비보다는 번데기였다. 한때 자신을 사랑해 준, 외국인 핑커톤을 언제까지고 기다리는 번데기였다. 그가 돌아오면 자신의 삶이 완전해질 것으로 기대하는, ‘아직 인형이나 갖고 놀’ 거나 ‘사탕이나 물고 있을’ 나이인 15살이었다.


핑커톤은 일본의 결혼과 계약을 언제든지 깰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999년 동안 집을 임대했지만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는 표현이나, ‘후일 미국인 아내와 결혼을 하겠노라’라는 다짐 등 모든 면에서 그는 믿음직스러운 남편상은 아니었고 친구로 두기에도 걱정스러운 인간이다. 그는 낯선 게이샤에 대한 호기심에 초초상과 결혼식을 올렸고, 그 때문에 초초상은 결국 가족과 친척들, 친구들에게 모두 버림받는다. 자신의 충동적인 호기심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파멸시킬지 몰랐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며 무책임한 자의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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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과 친구들에게 버림받는 초초상



“샤플레스 :
도대체 무슨 생각이오?
정말로 사랑에 빠진 거요?


핑커톤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이죠!
사랑인지 변덕인지 말하긴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단아함이
나를 매료시켰다는 거죠.
유리를 불어서 만든 것 같이
그 가냘픈 몸매
병풍 속에 그림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몸가짐
검게 빛나는 칠흑에서
갑자기 빠져나와
나비처럼 살며시 날아와서
조용하고 우아하게 내려앉은 자태
그 날개를 꺾어서라도
그녀를 붙잡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죠.”



꽃이 아름다워 갖고 싶어서 꺾어두고, 한 두 번 쳐다보고 향기도 맡아보고 하다가 질리니 버려두고 떠나는 것이다. 그 꽃이 다시 생각날 리는 없다. 사랑이란 것은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가슴 아프게 툭 떠오르지만, 호기심은 충족되면 다시는 의식 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

작품과 연관시켜 설명하느라

초초상을 나비와 번데기에 비유했지만,

여성을 대상화하려는 의도는 아님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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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극은 누구의 잘못인가?




핑커톤 : 전 세계 어디든 떠돌이 양키는 위험한 거래를 즐기죠. 모험 속에 원하는 곳, 어디에나 닻을 내리죠. 태풍이 불어와 배와 포구를 뒤흔들 때까지 가는 곳마다 가장 아름다운 꽃과 미인을 내 손에 넣을 때까지.


샤플레스 : 좋은 생각은 아니네.


핑커톤 : 이르는 항구마다 한 번씩의 사랑들.



초초상은 아이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샤플레스의 설득에 아이를 그들 가족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아이에게 자기를 원망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비겁한 핑커톤은 초초상의 얼굴을 보기조차 두려운지, 도망가버려 샤플레스와 새 아내 케이트가 그 죄를 모두 짊어져야 했다. 너무 비겁하고 야비한 그 모습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수컷 고양이는 양육에 대한 책임이 없다. 자식을 갖고 키우는 건 오로지 암컷 고양이의 영역이다. 자식에게 젖을 주기 위해 인간에게 빌빌거릴 필요도 없다. 그리고 다음 발정기가 되면 새로운 암컷 고양이를 찾아 자신의 본능을 다해 자손을 퍼뜨린다. 그것은 수컷의 본능이기 때문이므로 동물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사마귀의 예를 들면, 암컷과 수컷의 짝짓기 이후 암컷은 영양분을 위해 수컷을 잡아먹는다. 수컷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살기 위한 본능이다.


성범죄에 관한 뉴스 기사의 댓글을 보면, ‘남성이라는 성별의 본능’, ‘성욕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서 하는 소리’, ‘과거부터 성범죄는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는 당연히 강간이 있다.’ 라는 말로 정말로 이해할 수 없게도 피해자의 편을 들지 않고 가해자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보인다. 범죄자와 일반 시민들로 세상을 나눈다면, 분명 피해자의 편을 들어야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 분명한데도 같은 남자의 본능이라는 이유로 범죄자의 편을 들어준다. 인간에게 인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동물과 다르게 이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본능을 통제하는 법을 알아야 그깟 인권을 자랑하는 인간이라고 부를 것이 아닌가? 세상에 온갖 살인, 강간, 범죄가 있었다고 지성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그 범죄를 저지르는 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인가?


혹시나 이 글에도 국제결혼을 성범죄에 비유하는 것은 과하다거나, 페미니즘을 비하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혼의 의미는 배우자와 평생 함께 살기로 맹세하는 것이다. 결혼은 ‘나비를 잡아 핀으로 꽂아 판자에 고정해 놓는’ 것이 아니다. 그 맹세를 깨기 위해 이혼이 있는데, 이혼하지도 않고 3년간을 기다리게 하고 자기는 고향으로 돌아가 새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이성적으로 설명되는 행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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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풍(JAPONISM)을 보여주는 의상과 무대디자인



일본 게이샤들의 기모노 차림, 그리고 일본에서 부를 가진 자들의 옷차림과 대비되어 보이는 핑커톤과 샤플레스의 서양 의복 차림이 돋보였다. 왜 유럽에서 자포니즘이 유행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시각적으로 설득시킬 만큼 기모노는 아름다웠다. 이번에 구매한 프로그램 북에서 초초상의 기모노, 결혼식 예복이나 다른 사람들이 입은 일본 의복 등 여러 개 도안을 직접 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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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이진수 무대감독이 이끄는 무대 팀의 무대디자인이었다. 가운데에 정육면체로 된, 비어있는 공간이 있고, 그를 둘러싼 계단이 뒤쪽에 위치한다. 다소 지루해질 수 있는 평면적 무대에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있어, 마치 누군가의 이층집을 단면으로 잘라 몰래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신기했던 게, 주인공이 심정이 변하거나, 상황이 반전될 때 정육면체 공간과 계단이 회전한다. 극의 초반에 정육면체 공간이 회전하고, 극의 후반부에 계단이 회전해서 예상치 못한 시각적 재미를 주었다.


정육면체 공간은 초초상의 신혼집이 되기도 하고, 본조 승려가 나와서 초초상과 인연을 끊는 장소가 되기도 하며, 초초상이 핑커톤의 배신에 죽음을 선택한 자리가 되기도 한다. 한 공간은 보통 하나의 기억만을 담기 마련이라 극에서 시간의 전개에 따라 배경이 달라짐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게 되는데, 오페라 나비부인은 하나의 공간에서 삶의 극적인 순간이 진행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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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나비부인에서 보는 오케스트라



오페라는 배우가 모든 발화를 지휘자에 지휘에 맞춰 음악적인 선율을 타고 내뱉는다. 관람객은 무대 위에 있는 배우에게 이목이 쏠리지만, 지휘자가 지휘하는 이유는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 피트에 있는 연주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오페라를 관람할 때 들리는 음악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배우의 감정선과 말하는 타이밍과 정확하게 맞기 때문에 배경음악은 녹음된 것이고, 일반적인 무대와 비슷하게 배우가 음악에 맞춰서 연기하는 거로 생각하기 쉬운데, 오페라의 연주자들은 오케스트라 피트에 위치한다. 오케스트라 피트란,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피트, 구덩이라는 의미로 무대와 관객석 사이에, 조금 낮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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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는 연극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곡을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무대에 집중하기 위함이며, 오케스트라 피트가 무대보다 다소 아래에 위치해 음악이 골짜기에 모였다가 위로 확장되어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원래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곳이 무대 옆이라던가, 높이가 별반 차이 없는 곳이었는데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인원이 많아지면서 배우의 대사가 전달이 어려워 아래로 내린 것으로 보인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오케스트라를 맡은 뉴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단원이 약 50명에서 60명가량 된다. 오페라 나비부인 1막과 2막 사이에 짧은 쉬는 시간이 있어, 오케스트라 피트를 보러 내려가 보니 정말 생각보다 많은 인원에 놀라게 된다.


그들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들려준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의 공연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각적인 요소에 꽤 약하기 때문에 뭔가 실체가 보여야만 더욱 칭송받는 줄만 알았던 나에게 음악 하나만으로 풍성하고, 긴장되면서도 아름다운 분위기를 제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살짝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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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배우들과 한국 무용이 첨가된 오페라 나비부인



오페라는 극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가 말 대신 이탈리아어로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배우들이 전부 외국인이라고 착각했는데, 사실 전부 한국인이었다. 2시간 정도 되는 긴 러닝타임동안 성악을 한다니,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그게 과연 실현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심으로 다가오지만 실제로 보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역시 세상에는 재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무능한 아기로 태어나는데 살아오면서 자기를 갈고닦아 대중에게 엄청난 감동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재능을 능가하는 엄청난 노력이 숨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재능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에서 보이는 그 사람에게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이 있느냐에 상관없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땀 흘리고 노력하여 한 분야에서 자기만의 성공을 이룬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오페라 나비부인은 이탈리아어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해 자막을 무대 좌우와 2층에서 보기 쉽도록 무대의 위 편 총 세 군데에 화면을 붙여놓았다. 정동극장이나 남산 예술센터에서도 종종 자막을 제공하기 때문에 자막 자체에 거부감은 없었지만, 사실 무대와 자막 화면을 동시에 보는 것은 조금 불편하긴 했다. 무대 자체의 집중을 위한 의도로 오케스트라 피트를 마련했다고 생각하면, 공연을 공연 자체로 즐길 수 없이 뜻을 해석하는 수단이 필요하다면 그게 오페라의 본질을 고려한 것이 맞을지 의아하다. 그러나 유럽에서 직접 오페라를 본 적이 있는 친구는 자막을 문장 단위로 끊어 제공해서 보기 편했다고 하는 걸 보니, 자막에 대한 문제는 오페라가 모국어로 진행되지 않는 이상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오페라 나비부인에 초초상의 끝없는 기다림을 나타내는 부분에서 두 개의 부채를 들고 춤을 추면서 무대 한 바퀴를 돌고 떠난 무용수가 있었다. 그 장면 동안은 배우의 어떤 노랫소리가 없다. 다소 지루해질 수 있는 장면이지만, 정말 한없이 길어지는 기다림의 장면을 나타내었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기다림이란, 늘어지는 지루함보다는 팽팽한 긴장감에 좀 더 가깝지만 한국적 무용을 적절한 때에 넣은 것 같아 괜찮은 시도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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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맺으며



<오페라 나비부인>이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이 비극이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을지 모르겠다. 기득권의 무책임함과 그럴듯한 말에 넘어가 버리는 불쌍한 15살 여자아이의 결혼과 출산, 그리고 18살의 나이에 자살하는 선택이 사람들의 분노를 샀을지 아니면 누군가의 대리 만족을 시켜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럴 듯이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페라를 난생처음으로 관람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평가를 할 수 없는 장르를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이미 익숙한 장르를 접하게 되면, 기존의 작품과 비교를 하게 되고, 단점과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사이 나의 오롯한 주관과 생생한 느낌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또한, 첫 작품을 훌륭한 작품으로 접하는 것은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내 안에서 몇몇 가지로 수치화되어 앞으로 이 작품과 비슷한 역량을 갖춘 작품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들을 무자비하게 평가절하하게 될 것이며, 그런 작품을 만나게 될 때까지 오페라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게 될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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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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