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과 수행, 예술가와 수행자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6.09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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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전시-포스터_국립현대미술관-제공.jpg
 


국립현대미술관 박서보 회고전의 이번 전시 제목은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다. 특이하게도, 작가를 ‘수행자’ 라고 지칭하고 있다. 나에게 ‘수행’ 이란 고통스럽게 자신을 닦아 나가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기에 이번 전시의 제목을 듣고 다소 의아해했던 기억이 있다. 예술과 수행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박서보 작가의 작품들을 순서대로 제시하고 있다. 관객으로 하여금 원형질, 유전질 등의 특별한 이름으로 불려지는 각 시기들을 순서대로 관람하게 한다. 나 역시 그 순서대로 작가의 작품들을 관람했는데, 전시실을 나올 때쯤에는 왜 예술이 수행이며, 어찌하여 수행자라는 이름으로 그를 지칭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그에게 왜 예술가가 아닌 수행자라는 이름을 붙였는지에 대하여 사용 재료와 주제 측면에서 느낀 점을 진솔하게 풀어 보고자 한다.


먼저, 사용 재료의 측면에서 그가 ‘수행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1957년 발표한 <회화 No.1> 이후 제작된 원형질 연작에는 유화 물감, 잉크 뿐 아니라 가죽 등 혼합 재료들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1963년 발표된 작품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검정색 바탕에 물감 덩어리 내지는 여러 가지가 혼합되어 있는 재료들이 뭉쳐져 있다. 언뜻 보면 단단한 느낌 때문에 물감보다는 철을 녹여 부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전체가 검은색으로 칠해진 그림 하단에 노란 빛에 가까운 새로운 빛깔이 눈에 띄는데, 이는 작품에 광택이 도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물감과는 다른 오묘함을 선사한다. 전시 후반부로 갈수록 더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 후반부에는 한지와 혼합매체를, 또는 유화 물감과 연필을 함께 사용하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을 보는 이들은 작가가 물감이나 잉크 등의 재료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았음을, 새로운 재료를 구해 붙이거나 긁어 내는 등 많은 시도를 거쳐 한 작품을 완성했음을 깨닫는다. 다양한 재료들을 작품에 사용하기 전, 작가는 분명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재료들을 찾아 헤매고, 그 재료들의 표현법 및 가공법에 대해 고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술적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작품을 감상하는 이에게 온전히 가 닿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수행’ 이라는 건 ‘나를 닦아 행한다’ 라는 뜻이다. 묵묵히, 그러나 끝까지 자신이 생각하는 어떠한 것을 향해 도달해 나가는 사람이어야만 ‘수행자’ 라고 불리울 수 있다. 때때로 외롭고 고독할지라도 고통의 시간과 고뇌의 시간을 거쳐야 그 과정을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여러 재료를 등장시키기 위한 노력과 과정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되는 듯했다. 여러 시기의 작품을 살펴보며, 그가 정체된 상태에 있지 않고 한평생 다양한 재료들을 다양한 시도를 통해 적극 화폭에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주제의 표현 측면에서도 박서보 작가는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는 시대 상황과 작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솔직 담백하게 화폭에 담아내고 있었다. 아픔과 슬픔이 여과 없이, 온전히 작품을 감상하는 이에게 쏟아져 내려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앞서 언급한 1963년의 원형질 작품에서 작가의 감정을 잘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작품 표면에 나 있는, 마치 무언가와 충돌한 것처럼 깊은 흉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완전히 전달하는 요소라고 느꼈다. 달의 크레이터처럼 울퉁불퉁한 작품 표면을 통해 무엇인가 파괴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강력히 전달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작가의 생애가 적혀진 연대기를 다시금 되새겨 보고 나서야 이것이 우리 민족의 수난 속에서 한 개인이 겪어야 했던 혼란스러움과 외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되내어 보았다. 원형질 시기에서 바로 이어지는 유전질 시기에서는 한국의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다. 묘법 시기가 오면서 작가는 외부적 요소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의 예술가적 정신이 향하는 곳을 진솔하게 표현한 듯했다.


주제의 변화가 화폭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며 수행과 예술이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올바른 수행이란 외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계속해서 애정 어린 관심을 둘 때 비로소 시작되고, ‘나’ 라는 존재를 닦아 나가며 완연해지는 것인데 박서보 작가의 작품들이 그랬다. 한국이라는 한 국가가 겪어야만 했던 외부 상황과 그 상황 속에 던져진 한 개인의 절망에서 시작하여 가득 채워져 있던 것을 비워내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다른 이들까지 치유하고자 하는 작가는 때로는 고독하지만 끝내는 어떠한 신념을 향해 지칠 줄 모르고 나아가는 수행자 그 자체였던 것이다.


박서보 작가의 전시를 보기 전에는 예술과 수행이 독립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했지만, 수많은 작품들을 감상하고, 시기별 작품 변화 양상의 궤도를 따라가며 예술과 수행은 결코 완전히 독립적인 영역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추상적인 각각의 작품 속에서 한국적인 이미지들을 찾아 나가는 것 역시 의미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예술 작품 자체를 ‘수행’이라는 측면에서 인식해 보았다는 것이 매우 특별하고 새로웠다. 예술과 예술가를 긍정적인 부분에서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창을 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김보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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