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일상에서 찾은 신파 [공연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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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서재엔 다양한 책이 꽂혀 있다. 그래서 심심해지면 아버지의 책장을 둘러보며 시간을 떼우곤 하는데, 여러 책들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그러던 중 책장 한 구석에 먼지 쌓인 채 박혀있는 ‘희곡’에 대한 책을 들어 읽어 보았다. ‘유민영’ 저자의 ‘해방 50년의 희곡’이라는 책이었는데, 문학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 어렵지만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신파극’이다. 나는 사실 희곡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신파극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반가운 마음이 컸다. 고등학교 때 ‘한국사’를 배우면서 수도 없이 들어봤지만 정작 깊게 공부해보지는 않았던 신파극.
신파극을 더 깊게 책에서 공부해보고 싶었으나 책 속에서 신파극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찾기 힘들었다. 다만 책에서는 신파극에 대해 1930년대 이후 희곡계 특징으로 사실주의 희곡만이 활자화되어 발표되었을 뿐 신파극 등의 작품들은 대본공연으로만 끝났다고 하며 문학성에 있어 낙후되어 있었음을 지적하는데, 이것이 나로 하여금 더욱 신파극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신파극은 1910년대 초부터 1940년대 말까지 신극사(新劇史)의 주류를 이루었던 연극 양식의 하나로서 현대 세상 풍속과 인정 비화를 제재로 하는 통속적인 연극이다. 대체로 무르녹은 연애, 엽기적인 사건 등 강렬한 정서적 자극이 있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연극사로 볼 때 신파극은 일제강점기에 유행한 대중오락극 정도로 볼 수 있는데, 한국 신파극은 일본 신파극을 거의 그대로 직수입한 것이므로 일본 신파극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 신파극은 언어만 달랐을 뿐 거의 모든 것이 일본의 양식 그대로였다. 신파라는 명칭은 가부키에 대립하는 연극이라는 의미에서 ‘신파’라 칭하였으며 이에 대해 가부키는 ‘쿠파’로 불렸다.
신파극, 즉 신파 대중극 작가 중 ‘이서구’라는 인물이 있다. 이서구는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나 1923년에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에서 극단 토월회(土月會)를 창립함으로써 연극운동에 뛰어들었다. 1935년에는 동양극장 설립과 함께 전속 극작가로 활약하였는데, 이때가 이서구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전쟁 후에는 방송국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햇빛 쏟아지는 벌판」 등 수많은 라디오드라마를 썼고, 텔레비전 방송국이 등장한 뒤에는 주로 텔레비전 연속극을 발표하였다.
이서구의 작품은 주로 대중의 비극적 정서에 호소한 신파 희곡이 많으며, 역사극에 능하였다. 주요 희곡작품으로는 「동백꽃」(1925), 역사극 3부작 「폐허에 우는 충혼」, 「배소(配所)의 월색(月色)」, 「서광 3천리」(1925), 「어머니의 힘」(1930)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어머니의 힘」은 기생을 여주인공으로 한 전형적인 신파희곡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이서구는 동양극장시절 임선규 등과 함께 이 땅에 신파극을 대중극으로 토착화하는 데 기여한 대중극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 평범한 다른 문학도 쉬운 것이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환영받지 못했던 ‘희곡’을 주요 업으로 삼았던 그들의 모습이 참 신기하다. 비록 친일 행적이 있지만 신파극이라는 신극(新劇)을 한국에 자리 잡게 하고 이후 대중극으로 발전시킨 데에는 개척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나도 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렇듯 ‘지조’와 ‘신념’을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문학을 이 땅에서 개척해나갈 수 있을까. 평범하고 똑같은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던 찰나 아버지의 서재에서 자리하고 있던 ‘신파극’의 발견은 내게 ‘나의 문학’을 생각하게 해 본 좋은 경험이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일상이 지루하다면 누군가의 서재를 잠시 뒤적여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이것이 일상에서 찾은 ‘신파(新派)’일지도 모르겠다.
[이정문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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