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스페인,맑음] #11. 어색했던 것이 당연해지는 순간 - 다양한 연인들 편

글 입력 2019.05.2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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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月의 말라가, 오늘도 햇살 맑음



시원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 센트로의 단골 카페로 향하던 길이었다. 백발 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사진을 찍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할아버지 옆엔 똑같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하신 할머니 한 분이 함께 계셨다. 당연히 된다며 포즈를 취해보라고 말씀드렸다. 두 분은 활짝 웃으며 어깨동무도 하고, 팔짱도 끼셨다가 뽀뽀로 마무리를 하셨다! 두 분의 눈과 표정에서 사랑이 느껴져 참 예쁘고 부러웠다.


내가 본 스페인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참 자유로운 곳이다. 한국에선 길을 다닐 때 나이 든 부부가 애정표현하는 모습을 잘 못 본 것 같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젊은이, 중년층,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나이에 상관없이 애정 표현을 하는 연인의 모습을 자주 마주했다. 특히, 바닷가나 공원으로 산책을 가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거닐거나, 아이처럼 서로 물장구를 치는 노부부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어디에선가 우리나라에서 '연애'는 젊은 남녀가 그 주체로 정형화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확실히 드라마를 보아도, 영화를 보아도 사랑을 하는 주인공들은 이삼십 대의 남녀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처음 스페인에 왔을 땐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사뭇 놀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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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들과 처음으로 파티란 걸 했었다. 음식도 먹고, 한국의 술 게임도 전파하다가 밤이 깊어지니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몇몇 친구들과는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그날 처음 만난 친구, D는 자기가 마시는 와인처럼 흘러가듯이 이야기했다. 사실 난 게이야. 뭐랄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 처음 봤는데 뭘 믿고 이런 속 깊은 이야기를 해주나 놀라우면서도 정말 고마웠다.


D는 술기운을 빌려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천천히 풀어나갔다. 나도 와인을 많이 마셨는지 괜히 눈이 뜨거워졌다. 오랫동안 차별과 혐오, 존중과 공존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D, 고마워. 네가 그 일들을 하나하나 극복해나간 방식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한국에선 아직도 쉽게 커밍아웃을 하는 분위기는 아니거든.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도 그렇고 말이야."



나의 이야기에 D는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오히려 친한 사람일수록 그들이 자기를 싫어할까 봐 겁이 났고, 그래서 오히려 정말 친한 친구들에겐 오랫동안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 내가 게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굳이 친구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야. 진짜 친구라면 내가 누구든 나를 존중해준다는 걸 아니깐. 그 사람 말고도 나를 존중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엇 하러 내가 그들을 잡겠어?"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그의 남자친구 이야기에 닿았다. 그전엔 한없이 무거운 눈을 하고 있던 D가 남자친구 이야기를 시작하자 일순 표정이 밝아졌다. 그 순간, 그는 소수자도 무엇도 아닌 그냥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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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D를 이어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친구들을 자주 마주했다. 학교 캠퍼스에선 여자와 여자, 혹은 남자와 남자 커플이 서로를 안고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곳엔 그들을 예의주시하는 사람도 없고, 그 모습을 보며 숙덕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참 좋아 보였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부러웠다. '우리나라에서도 좀 더 다양한 연인들이 거리에 설 수 있다면, 그들이 겁내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부러움은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지?' 스페인 친구들의 태도나 행동을 살펴보며 얻은 나름의 해답은 뻔하지만 '인정과 존중'이었다. 써놓고 보니 민망할 정도로 너무 뻔한 답이다. 하지만 그들의 존중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이 작지만 큰 차이를 만들었다.


스페인어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언어이다. 명사는 남성명사와 여성명사로 나뉘어 있어 같은 술이라고 하더라도 맥주(La cerveza)는 여성명사, 와인(El vino)은 남성명사이다. 뿐만 아니라, 성별에 따라 다른 인칭 대명사를 사용해야 하고 형용사의 형태도 바꾸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주어가 생략되어도 그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뜬금없이 스페인어에 대한 설명을 잠시 곁들인 것은 내가 발견했던 작지만 큰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나에겐 마치 자매처럼 매일 붙어 다니는 3명의 스페인 친구들이 있었다. 언젠가, 그중 한 명과 밥을 먹을 때였다.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친구는 이런저런 근황들을 들려줬다. 그런데 다른 친구 이야기를 하며 여자를 가리키는 인칭대명사인 Ella가 아닌 남성 인칭대명사인 El을 사용했다. 처음엔 '네이티브도 실수를 할 만큼 스페인어가 어려운 거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실수라기엔 반복되는 표현에 나도 자연스럽게 그 친구를 El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친구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더 이상의 이야기는 생략하지만 내가 느낀 대로 이건 그들이 친구를 존중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단어 하나의 차이지만 그렇기에 마음으로 존중해주는 것이 아니면 신경 쓰지 못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사소한 차이가 모이고 모여 '나는 인정받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 좀 더 자유로운 사랑이 허용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에 있는 친구는 요즘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스몰토크 단골 질문인 "남자친구/여자친구 있어요?"라는 질문을 할 때, "애인" 혹은 "만나는 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꽤 괜찮은 변화인 듯하다. 여전히 나는 내가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간과하는 부분이, 그래서 무신경하게 내뱉은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렵지만 이런 단어 하나, 말 한마디를 바꿔 나가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너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서로의 잘못을 집어주는 것이 당연해지는 때가 올 수 있겠지라고 믿으면서. 오늘도 말을 체에 곱게 걸러 본다.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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