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을 통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베일 [문화 전반]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응원합니다!
글 입력 2019.05.20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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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존재를 응원합니다.”


 

평범한 하루 속, 평범하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금방 발견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중교통을 타는 순간에도 미디어를 시청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들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같이’ 살아가는 세상 속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 채 스쳐지나갈 정도로 왜 그들은 어두운 구석에서 생활하게 되었을까. 혹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을 막은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베일


 

사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우리’는 ‘다수’였기에 해결이 가능했던 것 같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협력한다면 어떤 어려운 일도 결국엔 해결책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에 ‘그들은’ 우리와 약간 다르다는 이유와 비교적 숫자가 적었기에 지금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그들을 우리는 소위 말해 ‘소수자’라고 일컫는다.

 



소수자


 

‘소수자’란, 사회의 권력 관계에서 그 특성이 소수에 위치하는 사람을 뜻한다. 즉 성, 나이, 장애, 인종, 국적, 종교, 사상 등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측면에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국가나 사회의 지배적 가치, 기준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의 대상이 되거나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소수자는 항상 선천적인 개념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후천적인 요건으로도 얼마든지 ‘소수자’가 될 수 있다. 또한 소수자는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상황과 여건에 따라 기존 성원도 얼마든지 사회적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우리도 언젠가는 ‘소수자’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양한 소수자들 중, 필자가 최근 관심을 기울이게 된 ‘난민’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소수자: 난민



가끔씩 난민과 이민을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본격적인 이야기 시작 전 잠깐 정리를 해보자.


우선 둘은 자격과 권리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민’은 국내에서 자유로운 체류활동 및 취업활동 등을 할 수 있는 영주자격을 취득하는 것을 뜻한다. 즉 자신의 국적을 유지하면서도 자유로운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해준다. 반면 ‘난민’은 국적, 인종, 종교, 특정 사회집단 구성원 신분 혹은 정치적 견해 때문에 자국에서 박해를 받고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난민 신청을 하여 난민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난민에 대해 눈을 뜨고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최근 이슈화 되었던 앙골라인 가족을 알게 된 이후부터 이다. 그들은 우리나라로 난민 인정 신청을 하였지만 패소가 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제주도의 난민 사건 등 ‘난민’은 더 이상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문제 중 하나이다. 그들은 ‘타자의 타자’가 아닌, ‘우리의 타자’로서 함께 고려해 봐야 할 문제가 된 것이다.

    



문화적 기제



난민에게도 여러 고충이 있지만 가장 ‘심리적’으로 힘든 것은 ‘문화’가 아니었을까-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어찌되었든 정치, 종교, 등 모든 것은 결국엔 ‘문화’라는 개념과 겹치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그들은 우리와 다른 습성, 종교, 교육 등을 받아왔기에 쉽게 인정받지도 스며들지도 못 하는 것은 사실이다. 문화적 가치관이 다르다 보면 아무리 그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나라로 왔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을 받아줄 경우, 위험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그들을 경계하다 보니 그들도 우리에게 경계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난민’들을 예술로 승화시켜 우리와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준 한 예술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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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을 위한 예술, 예술가 아이웨이웨이



중국의 미술가 아이웨이웨이, 그는 세계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큰 영향력을 주는 예술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시인 아이칭으로 아이웨이웨이가 1살이었을 당시 문화혁명이 일어나 1958년 중국 정부로부터 고향인 베이징에서 추방당했다. 그들은 난민 생활을 하다가 문화혁명이 끝난 1976년에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각종 부역에 동원되었던 아버지를 지켜보았던 그의 경험은 오늘날 난민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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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e


난민을 소재로 한 그의 작품 몇 가지 인상 깊었던 것을 소개하자면, 2014년에는 175명의 정치적 망명자들의 초상화를 레고로 만들어 전시한 <궤적Trace>을 시작으로 하여 런던에서 미술가 아니쉬 카푸어와 함께한 <컴패션 행진 Walk of Compassion>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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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fe passage


그리고 2016년 레스보스 섬에서 수집한 난민들의 구명조끼 만사천벌로 베를린 도심에 있는 콘체르토 홀 기둥을 감싼 설치작품 <안전한 파사주Safe Passage>는 독일의 난민 수용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이와 비슷하게 이탈리아 플로란스에는 난민들이 실제 탈출에 사용했던 고무보트로 건축물, 팔라조 스트로치를 감싼 작품 <재구성Reframe>이 있으며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는 17세기 건물인 샤를로텐포르그 궁전의 창문에 가득 주황색 구명 조끼를 쌓은 작품 <해돋이Soleil levant>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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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w of journey



그밖에도 고무 소재로, 고무 보트로 탈출하는 난민들을 7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스케일로 형상화 한 <여행의 법 The Law of Journey>, 난민들의 유류품들을 갤러리에 전시한 <빨래방 Laundromat>, 2016 그리고 난민들의 행적을 좇으며 영상으로 기록한 영화 <휴먼 플로우 Human Flow> 등 여러 작품이 세계 여러 미술관과 화랑에서 전시되고 있다.

 

    


마지막 한 마디



난민 문제는 오늘날 세계화로 누리는 편리함과 더불어 등장한 인류의 현상이기에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갑자기 한국에 다가온 난민 문제를 모두가 함께 이해하고 넓은 인류애로 수용하기엔 힘들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난민들을 수용하였을 경우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친 것은, 모든 난민들이 그와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예술가 아이웨이웨이의 시선에 등장하는 난민들처럼 분명 그들은 생존을 이어가기 위한 곳을 찾으러 자신의 고국을 버리고 온 이들이다.


필자는 여기서 ‘난민 수용 찬/반’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생각할 거리를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던져주고 싶다.


우리는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또한 더 이상 외면하거나 경계하지 말고

같이 더불어 가는 세상 속,

마주친 사람으로서 대우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참고


bizart

서울 신문

visla

public art



[김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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