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마와 빨간약,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문화전반]

미래를 감각하는 방식
글 입력 2019.05.15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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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다. 체력과 통장이 허락하는 만큼의 여가생활은 공연으로 충분히 채우기 때문에 스크린은 항상 뒷전이었다. 하지만 공연과는 다르게 개봉 후 몇 년이 흐른 후에도 '집에서'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장르가 영화기에, 언제나 조금 뒷북을 치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최근 영화보다 예전 영화를 조금 더 좋아하는 편이다. 시간이 검증해 준 고전의 가치와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시대에 비추어도 전혀 구시대적이지 않은 메시지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몇 십 년 전과 지금이 그다지 다를 게 없다는 방증이기도 해서 어딘가 씁쓸해지기도 한다. 뭐, 역사를 아무리 뒤지고 뒤져도 흠 없이 완벽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예술이 사회에게 건네는 일침은 언제나 조금쯤 진부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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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 시대다. AI(인공지능)가 소설도 쓰는 이 시대에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러다 완벽히 종말 해버리는 게 아닐까. 종말의 객체가 신체면 차라리 다행이다. 사지는 멀쩡한데 정신만 퇴화한다면 그 시대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몰락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본질과 존재에 대한 탐구보다 과학의 발전이 조금 앞서버려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명쾌히 답하지 못한 채 AI 시대를 맞이해버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던져 온 질문은 잠시 사장한 채로 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살아남기


1932년,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저명한 생물학자와 의학자를 가족으로 둔 헉슬리가 과학의 미래를 묻는 소설을 출간했을 때, 세상의 반응이 미지근했을 리 없다. 심지어 당시는 20세기 초반, 종교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넘어온 지 채 2세기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과학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했을 수도 있겠다. 아직 제대로 된 컴퓨터가 나오려면 한참 멀었는데, 아직 인공지능 나오려면 칠십 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하면서.

'멋진 신세계' 속의 신은 포드다. 1900년대 과학과 기계가 얼마나 거대한 영향력과 무서운 발전을 가지고 있었는지 충분히 감각하고도 남는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과학이 인간을 지배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을 통해 주관과 예술, 감각과 표현이 인간 고유의 본질을 정의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과연 완벽한 안정성과 객관성이 인간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가, 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며 신세계 사람들과 야만인을 대조한다. 결말에 가서, 독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과연 나라면 어느 곳의 주민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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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인간의 본성은 이성에 있고 감성은 억제해야 마땅한 존재라지만, 감성 없이 이성으로만 똘똘 뭉친 기계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참 맥을 갖추기 어렵다. 신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각을 멈추고 기계와 과학에게 나의 모든 삶을 내맡기면 그만이다. 그저 기계가 시키는 대로 태어나서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가끔 우울할 때면 과학이 만들어 낸 행복을 집어삼키면 된다. 그럼 이렇게 힘들게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되고, 취업 준비도 하지 않아도 되고, 내집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하얗게 바랜 머리를 보며 한숨 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대놓고 신세계를 선택하기에는 인간으로서 일말의 양심과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 조금 힘들더라도 인간답게 살아야 하지 않나, 이런 미련도 남는다. 결국 신세계에 순종하며 타율적으로 살아간다면, 그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인생이 아닌가. '삶', 우리의 모든 고통과 열정, 고난과 행복이 고도로 함축된 이 단어까지도 피동사로 만들어버리기에는 인간 역사가 너무나 아깝다.

결국 '멋진 신세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성과 감성, 이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관한 근본적 물음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어려운 질문이 작품 곳곳에 녹아들어 있고, 참 신기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멋진 신세계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빨간약 줄까, 파란약 줄까


고전이 주는 가치는 시대를 막론한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고전의 감성과 메시지가 여전히 유효한 까닭은, 아직도 과거의 고전이 물었던 근본 질문에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헉슬리가 그린 신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답하지 못했기에 워쇼스키는 매트릭스 세계관을 창조했다. 이제는 '멋진' 신세계도 아니고, '무서운' 0과 1의 세계라는 점에서 조금 더 소름 돋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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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매트릭스 시리즈는 단순히 디스토피아 SF라고 한정 짓기엔 그 내용이 너무나 방대하다. 과학보다 철학을 알아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SF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3편 결말쯤에 가서는 '아, 이건 나 따위가 해석하겠다고 덤비면 안 되는 영화 같은데...' 같은 생각까지 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헉슬리의 질문과 워쇼스키의 냉소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여전히 유효하고, 여전히 두려우며, 여전히 새롭고, 여전히 신선하다.

매트릭스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인공 네오가 총알을 피하는 장면이나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건네는 장면은 한 번쯤 봤을 테다. 가상에 안주하며 편안하게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가상을 깨고 새로운 현실을 마주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 앞에서 네오는 후자를 택한다. 그리고 네오 앞에 펼쳐진 현실은 바로 인간 퇴화와 문명의 상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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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의 소마가 인위적 행복이라는 사실, 매트릭스의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가상이라는 사실은 야만인 존과 파란 약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었고,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힘은 모두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왔다. 디스토피아 SF가 여전히 사랑을 받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의 앞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며,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계의 발전이 매섭게 인간을 따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주는 밝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보다 문명의 파괴를 그려내는 일이 조금 더 흥미 있기 때문도 있겠지만, 과거부터 이어 온 질문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도 분명 존재한다.


멋진 신세계, 토탈 리콜,
그리고 매트릭스의 디스토피아적 모티프는
영화와 소설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과학의 발전을 두려워하고 있을 수는 없다. '멋진 신세계'와 '매트릭스'가 세련된 이유는 인간의 몰락을 단순히 과학 탓으로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과학의 대결 구도를 취하지 않았기에 이 작품들의 주제가 질문의 형태를 띨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헉슬리의 질문에 우리는 끝없이 고민해야 한다. 과연 인간은 어떻게 해야 인간다울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나의 주관과 생명을 내가 진두지휘할 수 있을지.

결론은 하나다. 네오가 빨간약을 삼키고 인간의 삶을 되돌리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90년째 유효한 어떤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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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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