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2년 지기 친구와 같이 산다는 것 [기타]

글 입력 2019.04.29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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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오자마자 홀라당 옷부터 벗어 잠옷으로 갈아입고, 씻기 귀찮다며 투정을 부리는 것. 미처 빨지 못해 널브러진 속옷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들까지.


가족에게조차 보여주기 민망한 그 모습들이 12년 지기 절친이자 자취방 룸메이트인 친구 앞에서는 부끄럽지가 않다. 우리는 서로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저 유쾌하게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사이다.


이제 겨우 두 달을 같이 살았을 뿐이지만, 나의 첫 독립과 이 친구와의 생활은 꽤 안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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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을 같은 동네에서 자라 종일 붙어 다녔지만, 그만큼 싸움의 횟수도, 울고 웃던 나날도 많았던 우리였다. 비슷하지만 다른 환경에서 자라 서로의 사고방식이 많이 달라 아무리 오랜 시간을 봐왔다지만, 여태 싸움 한번 없이 맞춰 지낼 수 있는 건, 서로의 적정선을 파악하고 그 선을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물을 마시고 뚜껑을 닫아놓지 않는 것과 밀린 빨래와 설거지, 그리고 제때 버리지 않은 쓰레기를 견디지 못하는 생활습관은 서로의 사소하지만 명확한 ‘선’에 해당한다.


한번은 다른 친구를 데려와 방에서 재워준 적이 있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나뒹구는 페트병 뚜껑과 제자리를 잃은 물건들을 보면서 내가 만약 다른 친구와 살았다면 정말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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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 조승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애정 어린 무관심을 보내는 일이다. 누구보다 친하고 가까운 친구로서 서로의 일상에 스며드는 건 좋지만, 너무 깊숙이 침투하면서까지 서로를 해칠 필요는 없다.


특히 원룸에서 사는 탓에 일상이 완전히 노출되어 있어, 가끔은 무관심으로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배려를 보이기도 한다.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을 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오롯이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땐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10평 남짓 되는 한방에서 둘이 사는 일은 마냥 편하지 않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을 수도, 큰소리로 통화할 수도, 그리고 자기 전에 일기를 쓰기도 어렵다. 하지만 혼자 살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이 생활을 즐기는 이유는 사실 얻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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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해 먹기를 좋아하는 덕에 끼니를 거를 일이 없다는 것과 매 끼니를 같이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하루의 활력을 북돋는 일인지 모른다. 시험 기간에는 마주 앉아 같이 고생하고, 야식으로 허기를 달래며 시험이 끝난 직후 쓰러져 잠드는 그 모든 버거운 일상조차 ‘같이’ 나눈다는 이유만으로 큰 위로가 된다.


비 오는 날에는 부침가루를 사서 김치전을 해 먹고, 자기 전에는 나란히 누워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오늘 있었던 일과 봤던 것들, 그리고 생각했던 것들을 말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진지한 날들.


다음날에는 일어나자마자 서로의 잠버릇을 비웃었던 시시껄렁한 시간이 곧 우리가 잘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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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행복한 일이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허투루 보낸 날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같이 먹고 이야기하며 책을 읽고 공부하며 자는 순간마저 잊지 않고 머릿속에 붙잡아 놓는 재미에 산다.


잦은 싸움을 우려했던 자취라이프 시작 전과는 달리, 지금은 룸메이트가 서로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라며 안도하고 있다. 서로에게 무해한 선에서, 외롭지 않게 말이다.



[박민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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