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잉여로움’의 가치를 논하다 - 안 봐도 사는데 지장 없는 전시

<안 봐도 사는데 지장 없는 전시> 전시회 관람 프리뷰
글 입력 2019.04.23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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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쓸모가 없는, 도움이 안 되는 ‘예술’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전시회의 이름에서부터 쓸모없음의 향기가 느껴진다. 아마도 이를 노리고 기획한 전시일 것이다. 생활 속에서 예술을 발견한다는 모토로, 효용을 위해 하루를 소비하는 현대인들에게 무의미함이 가져다주는 ‘미’를 알리고자 한다는 포부를 내보인다. 사실 예술은 우리에게 그다지 쓸모 있는 분야가 아니다. 전시 안내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몰라도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늘날처럼 성과와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에게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을 계속해서 단축하고, 투입하는 시간에 대비하여 좋은 결과물을 산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 아무런 결과물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단지 딴 생각을 하게 만들 뿐인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전시 소개 글에는 이렇듯 쓸모가 없는 예술에도 가치가 있다고 적혀 있다. 별다른 특별함 없이 무난하게 흘러가는 삶에 존재하는 예술적인 순간들. 그것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왜 인간은 예술을 비롯하여 어찌 보면 시간 낭비에 가까울 수도 있는, ‘쓸모없음’이라는 속성에 주목하게 되는지.

 



1.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무게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문득 깨닫는 게 있다. 정말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이라는 거다. 여기서 ‘실용적’이라는 표현은 살아가는 데에 쓸모가 있는 물리적인 무언가를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철학은 그런 류의 공부는 아니다. 아무리 칸트와 데카르트의 철학을 공부한들 휴대폰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백날 고민을 해 보았자 노트북 충전기를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잉여’라 칭한다. 오죽하면 같은 학과, 혹은 비슷한 학과(같은 인문학 전공자들)의 친구들끼리도 우스갯소리로 이런 대화를 나눈다.

     


“솔직히 우리 다른 공부도 병행 안 하면 진짜 <잉여> 아니냐. 멋있는 거 빼고 남는 게 없어. 어디 가서 나 미학 공부해요-라고 말 하면 사람들 반응이, 와 멋있다. 그런데 뭐 배우는 학과예요? 한다니까. 생각 엄청 많이 하겠다, 이런 소리 많이 듣고. 뭐 공부하는 학과인지, 뭘 만들고 어떤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곳인지-떠올리기가 어려워서 그런가. 애초에 그런 쪽이랑 거리가 멀기는 하지. (웃음)”


  

오늘날의 사회는 철저한 효용주의에 따라 돌아간다. 당장 내가 하려는 행동이 쓸모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마련이며,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싫다 하더라도 그 일이 결과적으로 나에게 ‘유익’하다면 일단 시도는 해보게 된다. 효용을 우선시한다면 자연스럽게 일이나 행동에 대한 자기 자신의 선호도는 후순위로 밀려난다. 물론 효용과 선호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쉽지 않다.


조금 더 극단적인(?) 단어를 써서 이야기해보자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란 매우 어려우므로—‘생존’이라는 일차적인 조건을 떠올리며 효용의 토끼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게 아닐까. 아무래도 점점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말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나 자신의 행복과 만족보다 먼저 직면해야 할 ‘사는 것’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동기들과도 이런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우리는 뭐 해먹고 살까-와 같은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학년이 학년인 만큼 아직까지는 전자의 느낌에 가깝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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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강철의 연금술사> 중 한 부분.

'잉여인간'이라는 표현이 유독 와닿는다.


 

그러나 사람은 고성능 기계가 아니다. 사회의 효용만을 따지며 살아갈 수 있다면 사람 모습을 한 인공지능에 가까울 것이다. 안타까울 일인지 모르겠지만,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효율’이라는 덕목만을 좇으며 살아가기엔 우리의 마음을 붙잡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당장 시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펴지 않는 수많은 대학생들(여기에 본인도 포함)만 봐도 그렇다. 혹은 쉬어가도 괜찮다는 내용을 담은 감성 에세이들이 많은 인기를 얻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잘 받아야 할 학점,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취득해야 하는 자격증들, 제 시간에 끝내야 할 업무들. 최대한의 효용을 발휘해야 할 곳들을 무수히 많지만, 우리는 늘 ‘스위치를 킨’ 상태로 살아가지 않는다.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그저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든, 아무런 생각 없이 핸드폰을 킨 상태로 수십 분을 보내든, 잠을 청하든. 스위치를 꺼야 할 때는 분명히 있다. 물론 이러한 상황들은 효용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

 

그러나 이때의 ‘쓸모없음’이란, 보편의 기준이 주관적으로 규정한 틀에 불과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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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도 효용이라는 관점에서는
그저 <쓸모없음>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쓸모없음이 가치를 낳는 법이다.



 

2. 쓸모없는 것들이 필요해지는 시점


 

보통 우리가 무언가를 쓸모없다고 말할 때 그 판단 기준은 상술했듯, 사회가 규정한 ‘효용’이라는 가치다. 이때, 우리는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집중해야 하고, 고민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쉴 시간은 줄어든다. 나쁜 현상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일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켜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나아감으로써 자아실현을 실천할 수 있다면 당연히 보람차지 않겠는가.


내가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얻는다면 참으로 뿌듯할 것이다. 한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삶에 대한 문제와 분명히 연관이 있다. 어찌 되었건 인간은 사회라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기에.

 

그러나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쓸모없다고 칭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일 수 없다. 사람은 언제나 이성적일 수 없다. 이성이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를 구별할 특별한 능력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성에 따라‘만’ 살아가는 삶은 존재하기 힘들다. 만약 인간이 온전히 이성적인 존재였다면, 쓸모없는 것들을 과감하게 내칠 수 있는 존재라면, 애당초 사회를 통제하고 관리할 ‘규범’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딱히 규범으로 정해놓지 않아도 무엇이 자신 혹은 사회에서 이익이 되는 행동인지 아닌지를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규범으로 통제해야만 사람들의 시선을 이성의 영역으로 돌릴 수 있어서가 아닐까. 그만큼 쓸모없음의 영역이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 길을 지나가다 눈앞의 꽃에 시선을 주는 것은, 쓸모없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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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꼭 실물로 보고 싶은 작품 중 하나.


  

‘감성, 힐링, 소통, 위로’와 같은 키워드가 청년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인 것도 쓸모없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쓸모 있음만을 남기려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며 피로감을 느낀다.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라면 이렇듯 사회가 우선시하는 가치에 개인이 편승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피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자연스레 쓸모 있는 것으로부터, 쓸모없는 것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규범의 바깥으로 벗어나고자 한다. 잠시나마 테두리의 바깥에서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



 

3. 안 봐도 사는데 지장은 없지만


 

아마 본 전시가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사실도 비슷할 것이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쓸 데 없는 생각들에 관한 이야기. 벌써부터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다. 안 봐도 살아가는 데에는 물론 지장이 없겠지만, 본다면 스스로를 ‘쓸모없는’ 시간 속에 잠시 놓아둘 수 있는 전시일 것이라 생각한다. 맹목적으로 보편의 가치를 좇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간이 허용되는 전시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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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
- Unnecessary Exhibition In Life -


일자 : 2019.04.03 ~ 2019.09.15

시간
10:00 ~ 18:00
(1시간 전 입장마감)

*
월요일 휴관

장소
서울미술관 본관 M1 1층

티켓가격
성인 11,000원
학생(초/중/고) 7,000원
어린이(36개월이상) 5,000원
티켓 구입 당월 한 달간 무제한 입장

주최/주관
서울미술관

관람연령
전체관람가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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