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결한 희생은 없다 [도서]

박지리의 번외를 읽고
글 입력 2019.04.15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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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소풍을 떠나 텅 빈 고등학교. 학교에 남아 영화를 보던 소수의 학생이 총기에 맞아 사망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어떤 특별한 동기도 없이 17명을 잔인하게 쏘아 죽인 범인은 피해자들과 동급생이었던 ‘K’다. 사건은 매스컴을 타고 널리 알려졌고, 참사 1주기가 되던 날에는 전 국민이 이 어리고 불행한 피해자들을 위해 묵념했다.


나는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다. 더러는 내게 천운이 함께했다고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뭐든지 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지각해도, 숙제해 오지 않아도 모두 내게 괜찮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괜찮지 않은데, 나만이 괜찮다.


내 삶은 그날 이후, 번외가 되어버렸다.


*


고교 총기 난사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의 심리를 그린 ‘번외’는 ‘합체’,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맨홀’ 등의 작품을 남긴 고(故) 박지리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다. 158페이지의 얇은 소설이지만, 인간 존재에 던지는 작가 특유의 날카롭고 냉소적인 시선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소설은 주인공 소년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진행된다. 그래서 참사 1주기 다음 날 소년의 행적이라는 것 이외에는 딱히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소년의 행동은 지극히 타의적이고 즉흥적이다. 버스를 타고, 영화관에 들어가고, 택시를 타며 소년은 끊임없이 그 날의 사건을 회상한다.


소년의 시선은 무서울 정도로 냉소적이고 투명하다. 그리고 이 의식의 흐름에 몰입하다 보면, 나도 어느새 소년의 시선으로 소설 속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죽은 이들은 없는, 모순과 위선으로 가득 찬 생존자들의 세상.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소름 돋는 사실은, 소년의 시선이 수많은 사람을 죽인 K의 시선과 닮아 있었다는 것이다.

 


시장의 지시에 교장이 고개를 숙이고 시인이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들이 고개를 숙이고 희생자들의 부모들이 고개를 숙였다. 노련하게 죽음을 다루는 나이 든 사람들의 모습이 공포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참사 1주기, 사람들은 죽은 아이들을 위한 추도식을 연다. 하지만 소년의 눈에 추도식은 사람들이 ‘노련하게 죽음을 다루는’ 한 가지의 방법일 뿐이다. 참사 소식으로 온 페이지를 도배한, ‘신이 난 것 같은’ 언론들, 합동 장례식에서 우는 모습이 방영된 이후 지지율이 상승한 시장님, 추도식에서 자신의 짧은 시를 더듬더듬 읊는 늙은 시인, 그리고 묵념을 이끄는 역할을 원했지만 하지 못한 교장 선생님. 죽은 아이들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추도식은 나이 든 사람들의 명예와 허영이 걸린 거대한 행사장이 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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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희생.’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학생들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지만 소년은 의문을 가진다. ‘고결한’이라는 단어를 ‘목적도 자발성도 없는 죽음’에 갖다 붙이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지만 이 단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천주교 신자였던 피해자 ‘라파엘’은 천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평범한 동급생이었던 아이들은 죽음으로써 고결하게 희생된 천사가 되었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피해자는 ‘피해자답게’ 도덕적으로 아무 결함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그 누구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할 수 없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의 죽음에 씌워진 ‘고결한 희생’이라는 프레임은 일종의 억압이자 폭력이다.


소년이 언급했듯 이 아이들은 순백의 완벽한 피해자가 아니기에. 또한, 오직 죽음으로써 고결한 천사가 될 수 있는 거라면, 삶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소년은 왜 죽음 대신 죄책감과 허무로 얼룩진 삶을 열망하는가?



그날 선생님이 너에게 심부름을 시켰던 건 살라는 운명의 뜻이었던 거야... 그렇다면 그때 교실에 남아있던 다른 열여덟 명은 죽으라는 운명의 뜻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운명이란 혹시 하느님의 세속적인 이름?



‘고결한 희생’이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이 사건의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하지만 이토록 열을 다해 아이들의 죽음을 추모한 사람들도, 누군가의 죽음은 당연하고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인간이 정말 고귀한 존재라면, 당연하고 아무렇지 않은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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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지 않은 구역을 지워버리고, 유럽형 인종을 잔뜩 그려 넣은 가상의 아레나 설계도는 인간의 허영과 위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인간은 고귀하지 않다. 그리고 그 고귀하지 않음을 끊임없이 위선으로 포장하려 한다. 삶이 번외가 되어버린 소년은 이를 꿰뚫어본다. 하지만 소년은 시시하고 허무하고 위선적인 인간의 삶에 염증을 느끼다가도, 끝내 삶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어쩌면 이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일지도 모르겠다.



[황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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