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학교폭력 없는 '아름다운 세상'은 존재할 수 없더라도 [사람]

글 입력 2019.04.16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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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이 이런 거라면, 더 이상은 지구에 남아 있지 않겠어


'인간의 탈을 쓴 악마', '염치도 모르는 파렴치한', '그 부모에 그 자식', '우리 사회의 차세대 바이러스'.


나날이 그 심각성의 수위도, 일어나는 빈도도 높아져만 가는 학교폭력 관련 뉴스가 뜨면, 포털 사이트에는 위와 같은 댓글들이 수도 없이 달린다. 언어의 과격함을 나무라기 어려울 정도로, 가해자들의 만행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느끼게 할 때가 많다. 학교폭력에 관한 담론의 활성화를 본격적으로 야기했던 2011년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의 경우, 가해 학생들은 피해자의 목에 전깃줄을 감은 뒤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먹도록 강요했고, 용돈을 빼앗고 숙제를 대신 시키는 것은 물론, 새벽에 일어나 게임 레벨을 올리도록 협박하고 피해 학생을 샌드백 삼아 폭력을 휘두르는 등 각종 신체적, 정신적 모욕을 일삼았다. 우리 사회의 병폐를 드러내는 그 어떤 범죄든 참담한 건 마찬가지지만, 이렇게도 비인간적인 범죄의 실행 주체가 중학생이라는 데서, 그리고 그 주된 실행 공간은 학교였다는 데서 많은 이들은 속절 없이 무너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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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4회까지 방영된 JTBC 드라마 '아름다운 세상'은, 제목의 낭만이 무색하게도 학교폭력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치고자 하는 목표 의식을 가진 드라마이다. 아직 시청률은 낮지만 그 몰입도는 최근에 종영한 스카이캐슬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어 앞으로의 흥행이 기대된다. 최근 이삼년 간의 트렌드를 살펴보면, 시청자들이 드라마에서 기대하는 바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시청자들이 주로 자극적 소재 안에서 펼쳐지는 격정적 멜로나 무조건적 해피엔딩을 기대했다면, 요즘에는 멜로가 전혀 없어도, 현실과 떨어지기보다 오히려 지나치게 밀착적이어도 그 긴박감이 더 많은 시청층을 끌어들이는 듯 하다. '아름다운 세상'은 이와 같은 트렌드의 변화에 최적화된 드라마다.

드라마를 보면서 학교 폭력에 관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었다.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 '기존의 흔한 통념에 대한 반박'의 형식을 취할 것이며, 반박의 내용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므로 현재 '뜨거운 감자'인 학교 폭력에 대한 생각은 누구나 다를 수 있음을 먼저 밝히는 바이다.



학교폭력의 가해자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일 것이다?


물론 어떤 폭력 범죄를 마주하든 대중들은 극도의 반감을 표하게 되기 마련이지만, 학교폭력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유독 그들의 '사회적 인격' 자체를 부정하는 평가가 많이 나오고는 한다. 아마 어린 나이부터 타인에게 상처 주는 행위를 그토록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역겹고, 한편으로는 믿기도 어렵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일 것이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한 모종의 방어 기제인지도 모른다. 고등학생에서 중학생, 심지어는 요즘에 초등학생에까지 내려가고 있는 범죄의 하한선을 설명하면서 보편적 인류애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선천적 유전자에 대한 호소였는지도.

하지만 나는, 이러한 반응이 학교폭력의 특이점인 '집단성'을 간과해서 생긴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성인에 비해 청소년들이 훨씬 더 또래 집단에 의존적일 뿐 아니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1대 1 관계에서 일어나는 학교폭력 사건은 거의 전무에 가까울 정도로, 대부분의 사건들에서 피해자는 개인일지언정 가해자는 다수이고, 때로는 특정하기조차 어렵다. TV를 보다보면 너무도 어이가 없어 허탈함을 주는 가해자들의 인터뷰, 예컨대 '몇 대 때리지도 않았어요' '장난이었어요'와 같은 말들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들 말마따나 정말 '몇 대' 밖에 때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명이 열 대만 때렸어도, 주체가 열 명이면 벌써 백 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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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아름다운 세상'에서도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의 현저한 저하를 보이는 학생인 '준석'이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나머지 가해자들은 준석이의 꾐에 넘어가거나 집단에의 지나친 의존이 불러일으키는 판단력의 상실로 인해 가해 행위에 동참한 것으로 묘사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순박함'에 가까운 소년인 영철이를, 준석이가 '너 정말 남자다, 의리 있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장면은 소름 끼치도록 현실과 유사하다.

물론 학교폭력의 책임이 한 명의 개인에만 있지 않다고 해서, 그 집단의 숫자만큼 개별 가해 학생들의 책임이 분산되고 옅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결코, 그들이 '사이코패스'로 치부될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의 교화 가능성이 피해자의 아픔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폭력 사안의 처리에 있어서 최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단연코 피해자의 상처이며, 가해 학생들을 어떻게 다시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들로 성장시킬 것인지의 문제는 그 중요성과는 별개로 피해자에 대한 처우보다는 후순위의 사안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 신념에도 불구하고, 최근 학교폭력에 관한 대중적 논의를 보다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관련 이슈가 뉴스화될 때마다, 댓글에는 어김 없이 '소년법'의 폐지를 논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싹수가 노란 아이들에게 선처를 해주어 봤자 재범을 할 가능성만 높일 뿐이라고, 처음부터 강력한 형벌로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형벌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가 응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린 소년일지라도 그의 범죄 행위에 걸맞는 처벌로 전국민적 통쾌함과 더불어 피해자의 억울함에 대한 보상을 도모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소년법의 폐지가 사회 전체를 피가 순환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기계적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공포를 갖고 있다.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이 아직 성인에 비해 분별력 및 이성적 판단력에 있어 부족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제도권 내 교육을 제공하는 한편 일시적으로 참정권을 제한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한 번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거의 영구히 사회에서의 건강한 삶을 박탈당하게 만들 수 있기에, 소년법은 소년들의 범죄에 대해서 응당한 처벌을 내리되 성인에 비해서는 그 강도를 낮추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폭력의 가해자들을 '사이코패스'로 낙인찍고, 그들의 개별적 특성을 배제한 채 전체를 '교화 불가능한 악마'로 규정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든다.



제대로 된 교사라면 미리 학교폭력을 눈치챘어야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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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교사'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이중적이다. 여교사를 '결혼 1순위 신붓감'으로 여기는 등 직업의 안정성이나 워라밸(워크앤 라이프 밸런스)의 측면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현재 공교육의 붕괴 현상이나 학생들의 일탈 행동 증가 등의 주된 원인으로 교사를 비난하며 그들을 깎아 내린다. 현장의 교사들은 사실 과거에 비해 더 높은 학력 수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학부모나 학생들에게는 예전보다 훨씬 괄시받고 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여느 집단에나 존재하는, '집단에 대한 이미지를 악화시키는' 교사들도 분명히 있다. 학교폭력 사안이 일어나 피해자가 상담을 요청했는데도, 혹여나 자신에게 책임이 덧씌워질까 전전긍긍하며 사안을 축소시키려 한다거나 - 평소 정말 학생들에게 무관심하며 1년의 목표가 '사건 없이 무탈히 학생들 진급시키기' 밖에 없어 조종례 시간 외에는 반 학생과 일절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는 교사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교사로서의 소명 의식 하나로 주어진 일의 몇 배를 자발적으로 해내는 교사들도 많다. 갖은 행정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없는 시간을 쪼개 한 명의 학생이라도 더 상담하고,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학생의 표정이 어두우면 나중에 따로 물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학교폭력이 일어나면 대중의 관심은 '교사가 왜 그것을 몰랐느냐'에 대한 일방적 비난으로 몰릴 때가 많다. 그래서 실제로 대학교 교직 수업들에서는, 예비 교사들에게 학생들과 대화 나눈 거의 모든 사항들을 기록에 남겨 놓으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래야 혹여나 나중에 사건이 발생했을 때 책임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하기는 무척 힘들 뿐더러, 교사들은 어쩔 수 없이 기록을 남기면서도 회의감에 빠지게 되기 쉽다. '내가 그렇게 무능한 교사인가?'

몰상식한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을 아끼는 제대로 된 교사였더라도 학교 폭력을 예측하지 못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10대 청소년들은, 교사나 부모님보다도 친구들에게 훨씬 더 많이 의지하며, 어른들에게 이야기했다가 괜히 사태를 더 키우거나 보복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수의 학교폭력은 교내보다도 교외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교내의 학생 생활 지도를 총괄하는 교사의 입장에서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일차적 책임을 무조건적으로 교사에게 돌리는 것은, 도리어 우리가 그토록 욕하는 교사의 '사태 방관적 태도' 혹은 '책임 회피적 태도'를 강화시킬 위험성이 크다.


학교폭력의 해결은 미시적 책임 소재인 교사나 학교에 대한 비난보다도, 거시적 책임 소재인 사회 제도, 교육 문화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창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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