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유쾌한 착란과 꿈의 서사, "데미안" 다시 읽기 [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이라 불리는 이유
글 입력 2019.04.0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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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지난겨울, 다시 펼쳐든 그 책은 전에 없던 깨달음과 성장통을 느끼게 했다. 어렸을 때 몇 장 넘기다 이해하기 어려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덮어버렸던 그 책, <데미안>이 나의 내면을 흔들어놓아 소감을 적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글을 남긴다. 지인이라면 <데미안>을 꼭 추천하고 싶은 마음을 조금은 뒤로하고, 당신이 처음 혹은 다시 한 번, 읽어주었으면 하는 이유를 몇 가지 적어보려 한다.

 

 

 

Synopsis.



<데미안>이 워낙 유명한 책이라 조금만 검색을 해보면 줄거리 정도는 금세 파악할 수 있지만, 작가의 서론을 바탕으로 필자가 간추려본 것은 다음과 같다.

 

우선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주인공의 내면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근원에서 출발해 어떤 가치를 향해 가는지 한 사람의 내면적 서사를 아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으며, 달콤하거나 조화가 없는 착란과 꿈의 맛’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강한 믿음과 기대로 마지막에 가서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어린 소년 싱클레어가 밝음과 어둠이라는 두 세계에 대해 인식한 이후, 가정을 벗어나 청년이 되고 어떤 종류의 ‘종말’과 변화에 이르는 동안, 책을 읽는 독자의 스스로의 내면을 관찰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독자가 이해하는 대로 각자의 데미안을 마음속에 그려보면 책의 내용이 더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demian.jpg▲ <데미안>의 다양한 표지들

 


‘고전’ <데미안>



데미안을 일러 흔히 고전이라고들 한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로 청소년 필독 도서에 빠지지 않고 올라 많은 이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제목의 <데미안>. 청소년이 읽기에는 다소 어려울 수 있으나, 한 소년의 내면이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며 학생들이 무언가를 느끼기 바랐던 교육자 입장의 추천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가 지나 성인이 되어 읽은 <데미안>은 길지 않은 지난 시간 동안의 조용한 방황을 되짚어보게 해주었고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으며 소중한 것임을 일러주었다. 고전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내면이 혼란스러울 때 꼭 한번 다시 꺼내보고 싶은 책이 된 <데미안>이 이런 맥락에서 고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세계를 품다



<데미안>에는 두 개의 세계가 등장한다. 밝음과 어둠으로 나뉘는 그 두 세상 모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좋게 평가하고 존경하느냐와 그렇지 않느냐로 나뉠 뿐이다. 두 세계는 다음과 같이 대비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밝음' – 종교적, 실제적 의미의 아버지의 집, 친절함, 평화와 질서, 안식, 사랑, 참회와 용서


'어둠' – 아름답고도 무서운, 싸움과 비밀, 탕아 이야기, 폭력과 불안, 소음


 

우리는 늘 두 세계 중 어디에서 살아갈 것인지 고민한다. 두 개의 밝고 어두운 자아가 내 안에서 논쟁을 벌이며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판사는 양심이다. 양심으로 인해 내적 판단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때로 ‘양심의 가책’이 뒤따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꼭 분리해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내면에서 비롯된 두 자아는 상반되지만 서로를 보완해주는 존재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밝음의 균일로 어둠이 피어나고, 어둠의 균열로 밝음이 피어나는 성장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어떻게 단단해졌는지 돌아보며 나는 ‘포용’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두 가지 모습의 신적 존재



주인공 싱클레어를 성장하게 한 존재를 꼽으라면, 물론 제일은 ‘데미안’일 것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막 십 대에 접어들었을 무렵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에게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신앙에 대해,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의 다른 해석에 대해, 세상의 종말에 대해 물음을 던졌고 이에 싱클레어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늘 마음 가까이에 머물러 있었다.

 

 

1) 베아트리체


이외에도 그 못지않게 싱클레어에게 길을 제시해준 존재는 단연 베아트리체와 압락사스라고 할 수 있겠다. 베아트리체를 만나기 전의 싱클레어는 방황을 겪는 사춘기 소년이었다. 세상에 대한 반항심으로 ‘자신과 같은 인재에게 왜 더 나은 자리를 주지 않느냐’는 식의 태도를 보여 이 대목이 엘리트의 소명의식을 강조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만큼 자신보다 더 나은 존재를 만나지 못하고 길을 헤매는 덜 자란 아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크기변환_베아타 베아트릭스-단테 가브리엘 로제티.jpg▲ 베아타 베아트릭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그런 그에게 다시금 빛을 찾아준 것이 베아트리체였다. 베아트리체는 하나의 빛이자 내면의 여성성(아니마)으로 싱클레어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의미 없는 방황을 그만두고 스스로의 ‘환한 세계’를 구축해 나가라는 메시지를 지닌 고귀한 상징적 존재로서, 그를 만난 이후의 싱클레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만의 제단을 만들고 밝음을 갈망하며,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2) 아브락사스


다시금 밝음을 찾고 새로운 신념을 구축해나가던 싱클레어는 또 다른 깨달음의 문턱에 다다른다. 신앙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 그 유명한 ‘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때가 그에게 온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이 구절을 이해하기까지, 아니 지금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분명한 것은 서로를 가두고 있는 빛과 어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밝음으로 인해 어둠을 보지 못하고, 어둠으로 인해 밝음을 보지 못하면 어느 쪽으로든 알을 깨어내야 한다.


그런데 거기서 깨어나 태어난 새가 압락사스에게로 날아간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책의 내용에 의하면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으로, 두 세계의 결합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신-으로 해석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므로, 아마 좀 더 나이가 든 후에 다시 읽어본다면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크기변환_dali_geopoliticus_child.jpg▲ 신인류의 탄생을 지켜보는 아이, 살바도르 달리

 


 

비판적 읽기



분명히 같은 텍스트지만, 독자에 따라 <데미안>에 대한 해석과 관점은 아주 다양하게 나뉘었다.

 

젠더 의식 측면에서 보면, 남자 주인공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한 쌍으로 등장하여 서로 다른 모습이었다가 합일을 이루는 모습이 아주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인간 자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남자 주인공을 내세워 그들만의 자아실현을 하고 성장한다는 서사는 여성 인물을 자연스레 주변화한다. 한 소녀에서 비롯된 베아트리체라는 상징성과 신성한 모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에바 부인은 그들의 성장을 돕는 역할 이상의 것을 하지 못한다. 아마 <데미안>이 현대에 출간되었다면 젠더적 관점의 좀 더 강도 높은 비판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품의 내용에 집중하여 내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서사가 너무 내면에 치우쳐져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갈 수 있겠다. <데미안>이 워낙 유명한 자아실현 소설이나, 주인공 싱클레어가 무언가를 깨닫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외부의 사건이나 자극은 거의 배제되어있다. 그의 심리를 깊숙이 파고든 내면 서술을 연속적인 사건들로 파악하고 작품 전체를 관통시키려다 보면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부분이 다른 소설과의 차별성을 지니게 해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예민하고 영리한 아이의 피곤한 내면 서술이 누군가에게는 달갑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소설이라면 응당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구조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속에서만 밑도 끝도 없이 끙끙 앓는 싱클레어가 꽤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에도 충분히 동감한다.



크기변환_468483[0].jpg▲ 1919년 독일어 초판본 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데미안>이 고전이라 불리는 이유는,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라며 세대를 건너온 입소문과 작가의 유명세를 차치하고서라도, 독일 문학 특유의 진중함과 철학적 고민이 점철되어 있는 <데미안>은 정말 좋지만 어려운 책이다. 단번에 이해하기란 힘들고 여러 번 곱씹으며 독자 스스로의 삶에 대해 함께 고민했을 때야만 비로소 어렴풋이 해석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려운 책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렵게만 읽을 필요는 없다. 어렸든, 좀 더 나이가 들었든 그 때의 내가 읽고 느낀 바를 나만의 <데미안>에 대한 해석으로 삼고, 이를 삶의 힌트로 얻어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읽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차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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