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이 내 이름에 심어둔 것 [기타]
글 입력 2019.04.03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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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쌀쌀한 날 포근한 곳에서 읽고 싶은 책이 있다. 시인 김현의 산문집 < 아무튼, 스웨터 >가 그렇다. 아무래도 활자 자체만으로 따뜻함을 풍기는 단어가 제목에 쓰였기에 더욱 그리 여겨지는지도 모른다.내겐 소규모 모임이 하나 있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구성원이 달에 두 번 릴레이로 주제를 내고 그에 맞춰 자유로운 형식으로 글을 써서 함께 본다. 나는 조금 특별한 소재로 글을 쓰고 싶을 때 어느 사물에 생명을 부여해 상상해보려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사물의 보이지 않는 물성이 보이는 듯하다. 이를테면 '스웨터의 발성'이라던지 '스웨터의 인간성'이라던지 '스웨터의 이름'처럼 말이다.이는 모두 < 아무튼, 스웨터 >에 쓰인 소제목이다. 저자 김현의 말을 빌리자면 일명 '스웨터 성애자'인 그는 스웨터를 의인화한 엉뚱한 상상이나, 스웨터가 지닌 물성과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에 섞어보는 등 여러 방면으로 본인만의 고찰을 스웨터에 빗대어 흥미롭게 풀어냈다. 그렇기에 그의 글은 언제나 사고를 전환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더군다나 4월의 꽃샘추위가 이는 요즘은 포근한 이부자리 안에서 < 아무튼, 스웨터 >를 연신 손에 든다. 며칠 전엔 이 구절을 긴 시간 곱씹었다.당신을 당신의 이름으로 부르고자 처음으로 마음먹은 사람은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심어놓고 싶었던 건지, 오늘 밤에는 곰곰 궁리해볼 일이다.< 아무튼,스웨터 > 스웨터의 이름 중이름,,착할 선, 꽃부리 영. 게다가 김 씨 성이 붙은 내 이름은 세 자 모두 한자 키로 변환하면 첫 번째로 나오는 한자들로 조합되었다. 이럴 때면 '한자 이름 찾기 쉬워서 좋네' 하다가도 항상 '딸내미 이름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냐?'하는 생각이 바로 따라붙었다.어린 시절엔 누군가 내게 '아줌마 이름 같아'라고 한 말을 듣고선 언젠가 꼭 예쁜 한글 이름으로 개명하겠다는 포부를 다졌다. 이때 지어뒀던 이름 중 하나는 '하임'. 별 뜻은 없다. 그저 둥글하고 귀여운 아이가 떠오를만한 이름을 지니고 싶었을 뿐. 이 포부는 최근까지도 잔열이 남아있었고 어찌 됐든 나는 아직 선영이로 살고 있다. 지금의 선영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린아이 그리고 할머니가 될 때 까지 어느 나이에서도 이상하지 않고 유행도 타지 않을 담백한 이름.그 담백함 덕분인지 '선영'이라는 명사는 참 이곳저곳에서 많이 들려온다. 나의 엄마 종예 씨의 고향에서는 등 위에 '선영 택시'라 적힌 택시들이 시내에서 줄곧 보이고 교복 시절에는 여러 도서와 교과서에서 인물을 예로 드는 글이라면 줄곧 선영이가 지명되곤 했다. (자매품으로 '민영이' 와 '민수' 가 있다. 실제 나의 형제들이 지닌 이름이다.) 또, 내게 사랑한다 외치던 광고 문구는 내 이름을 처음 들은 사람에게까지 일종의 친근감을 선사했을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내게 이름의 뜻을 물어보면 나름 호기롭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내 이름에 '착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어서 그 이름을 지닌 나는 괜스레 착한 아이가 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마다 목소리에 세상 나긋함을 싣고 허리를 세우며 자세를 바로잡게 되기도 했다.
27년 전, 나를 선영이라 부르기로 마음먹은 나의 어른들은 어쩌면, 이렇듯 뭉근한 자긍심과 담백함을 내게 오래도록 심어두고 싶었던 걸까.[김선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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