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세련된 퓨전, 뮤지컬 '적벽' [공연]

판소리라고 어려워하지 마세요
글 입력 2019.03.3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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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본래 판소리나 전통예술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적벽가> 또한 수업 시간에나 들어봤던 이름이었고, '삼국지'는 더더욱 생소해 사전지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전통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무게감이 크게 다가왔던 것도 같고, 판소리라는 장르가 아직 나에겐 조금 낯선 공연이어서 그랬던 것도 같다.

변명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고 있지만 사실 내가 그동안 전통과 멀어졌던 까닭은 편견 때문이었다. 문화예술 에디터를 하고 있는 내가 여전히 문화편식 중이라는 사실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편견은 공연 후 완전히 부스러졌고, 부끄러움은 배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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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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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을 본 후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세련됨'이었다. 깔끔한 직선형의 무대, 날카롭고 시원시원한 디자인의 의상, 극의 분위기를 섬세하게 휘어잡는 조명까지, 이 극의 요소들은 하나같이 세련되었다. 등장인물들이 무대 위에 등장할 때마다 까닭 모르게 느껴지는 위압감과 중압감 또한 무대와 조명이 자아내는 묵직한 호흡 때문인 듯싶었다.

'적벽'의 세련된 미학은 절제에서 나온다. 배경이 전장이라 하여 무대까지 어지러운 것은 아니었다. 검은색 바닥과 대조되는 흰색 무대는 조명에 따라 분위기를 달리해 별다른 무대장치 없이도 전장의 치열함과 인물의 갈등을 여과 없이 반사한다. 극 초반, 가사를 알아듣기 위해 무대 옆에 설치된 스크린에 계속 눈길을 주던 내가 '적벽대전' 장면에서는 한 순간도 빠짐없이 무대를 눈에 담았다. 이 극의 플롯은 가사에 담겨있다기보다 무대 위에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 가사가 어렵다하여 내내 스크린만 보지는 않기를 바라는 이유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초반과 중반까지 휘몰아치던 세련된 기상이 후반부에는 조금씩 약화된다는 것이다. 별다른 대사나 가사 없이도 조명과 안무, 음악, 그리고 배우들의 표정으로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하던 초반과 다르게,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 텍스트가 다소 과해진다. 군인들의 애환을 그렇게나 오랫동안 노래해야 하는지, 전쟁에 아픔을 겪는 서민들의 애환이 메시지라 할지라도 초반의 스피디함을 버릴 정도로 중요했어야만 했는지 아쉽다. 조조의 '새타령'이 이어질 때는 '적벽대전' 장면이 너무도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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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의 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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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제갈공명이다. 사실 전쟁 서사에서 여성 캐릭터가 적당한 포지션을 취하기가 상당히 애매한 것이 현실이다. 특히 현대 전쟁도 아닌 '삼국지'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면 그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적벽'에서는 이러한 고민을 공명, 자룡, 주유 등의 주요 캐릭터에 여성 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변화를 꾀했다. 물론 캐릭터의 분량이나 몇몇 대사에서는 아쉬움도 존재하지만, 적벽대전을 남성의 전유물로 끌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 신선하다. 퓨전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적벽'을 '적벽'답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바로 음악과 춤이다. 판소리와 쉽게 연관 짓기 힘든 라이브 밴드가 극의 음악을 담당한다. 세련된 음악에 합창이 더해지면 그 집중도와 몰입감은 더욱 커진다. 박진감 넘치는 박자와 배우들의 합창이 극장을 꽉 채울 때, 텅 비어 보이던 깔끔한 무대가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춤과 부채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소품이라곤 오로지 부채뿐이지만, 그 부채들이 가진 상징성과 매력은 상당하다. 그리고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안무와 합쳐져 웅장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적벽'에서 춤과 부채는 단순히 극 텍스트를 보조하는 역할에만 국한되지 않고, 극을 이끌어나가는 주체로 기능한다. 그렇기에 가사보다 안무에 집중하여 극을 즐길 때 극의 매력이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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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극은 극장 하나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는 극이다. 4월, 푸른 하늘 아래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과 함께 돌담길을 걷다 보면 정갈한 한옥식 건물이 등장한다. 기회가 된다면 정동극장 앞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예쁜 산책과 좋은 공연보다 더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시놉시스

위, 한, 오 삼국이 분립하고 황금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난무한 한나라 말엽.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로 형제의 의를 맺고 권좌를 차지한 조조에 대항할 계략을 찾기 위해 제갈공명을 찾아가 삼고초려 한다. 한편 오나라 주유는 조조를 멸하게 할 화공(火攻)을 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데, 때 마침 그를 찾아온 책사 공명이 놀랍게도 동남풍을 불어오게 한다. 이를 빌어 주유는 화공으로 조조군에 맹공을 퍼붓고, 조조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적벽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백 만군을 잃고 도망가는 조조를 가로막는 것은…



공연 정보

공연명: 2019 정동극장 기획공연 <적벽>

공연일정: 2019. 3. 22. (금) ~ 5. 12. (일)

공연시간: 수 – 토 8시 / 일요일 3시
(월, 화 쉼)

공연장소: 정동극장

러닝타임: 100분

관람료: R석 50,000원 / S석 30,000원
학생할인 15,000원 (초, 중, 고)

관람등급: 8세 이상

주최/제작: (재)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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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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