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대 미술의 거장, 앤디 워홀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3.30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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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앤디 워홀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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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난 앤디 워홀은 어린 시절에 무도병을 앓아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어머니 곁에서 돌봄을 받으며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으며 관찰자가 되어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 인간의 변화하는 모습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피츠버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자 했던 앤디 워홀은 뉴욕으로 가서 삽화가로 취직하였다. 1950년대에 성공적인 삽화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여 1956년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에서 워홀은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고 두 번째 전시회 이후 꽤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순수 미술에 대한 마음속의 열망이 있던 그에게 상업 미술은 바라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고 결국 상업미술의 성공을 과감히 접게 되었다. 다른 화가들과 차별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자 고민하고 연구하던 그는 갤러리 주인 뮤엘 라투에게서 ‘이제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에서 그림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수프 캔을 그려보는 건 어때?’라는 아이디어 제안을 받게 되어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캠벨 수프 깡통 32점을 그리게 되었다.


아트 딜러인 어빙 블룸은 캠벨 수프가 마트에서 파는 것이니 마트 진열대에서 파는 것처럼 전시를 하자고 하여 갤러리에 마트 진열대 같은 작품 전시대를 설치하고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32점을 전시했다. 이런 디스플레이는 당시로써는 아주 파격적이었던 것이었고 주변 갤러리에서 벤치마킹하기 바빴다고 한다. 순수미술을 하면서 ‘수프 캔’을 그리는 특별한 발상으로 말도 많고 비난도 많았지만 가장 흔해빠진 것을 가장 독창적인 예술로 승화시킨 그는 이러한 독창성으로 인해 스타가 되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은 앤디 워홀은 곧바로 판화, 회화, 일러스트레이션, 영화 등 자신의 범위를 넓혀 갔고 뉴욕 맨하탄 중심에 자신의 작업실도 열어서 많은 유명인들을 초대했고 이것이 바로 팩토리의 시초가 되었다. 여기서 앤디 워홀은 유명인들과의 인맥을 넓혔고 자신의 이름을 더 알리기 시작했다. 판화 기법으로 계속 주 작업을 하면서 내용은 보다 일반인들에게 친근한 소재를 찾아다니던 앤디 워홀은 실크스크린 판화 기법으로 코카콜라, 꽃 등 어린 아이가 봐도 아는 쉬운 내용의 미술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방법은 앤디 워홀을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고 그와 동시에 금전적으로도 성공을 할 수 있었다. 앤디 워홀의 작품은 더 대중적으로 나아가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인 마를린 먼로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판화로 찍어냈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화 촬영에도 관심을 가지며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직접 촬영을 하며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 1963년 첫 영화 《잠 Sleep》을 촬영하였다.


1965년에는 영화 만드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회화와의 작별을 선언하기도 하였을 정도로 언더그라운드 영화 운동에 매료되었고 총 28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1970년대부터는 사교계나 정치계 인물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1972년 《마오 Mao》 시리즈로 다시 회화 제작에 전념하였고 1983년 장 미셸 바스키아와 친분을 맺고 함께 작업하였다. 그러던 1987년 2월 22일 담낭 수술과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2. 앤디 워홀의 천재성



워홀은 현대 미술의 아이콘이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었던 그는 동시대 문화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이를 시각화해내는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워홀은 자신의 예술을 ‘세상의 거울’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기계이기를 원했던 워홀은 기계와 같은 미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기계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세계 속에서 그의 이미지도 그의 명성과 함께 증식을 거듭하고 있다. “내가 이런 방식으로 페인팅을 하는 이유는 내가 기계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기존 예술가는 한 개의 작품을 정성스럽게 그려서 한 개의 작품을 비싸게 팔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작품을 대량생산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였고 그것이 그 작품의 핵심이었다. 예술을 대량 생산할 생각을 한 앤디 워홀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애초부터 비범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앤디 워홀은 1928년에 태어나 1987년 59세로 사망하기까지 그의 천재성이 많이 드러났다.


유년기 때 경험한 행복감이 한 사람의 인생을 강력하게 움직이는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나는 앤디 워홀이 팝 아트의 거장이 된 데에 어머니의 교육방식과 일관성 있는 양육태도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7살 때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사진기도 사주고 집의 지하에 암실을 만들어 사진 작품을 현상까지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아무리 그가 탁월한 재능을 타고 태어났다 할지라도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 그의 창조적 재능이 크게 빛을 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 충분히 공감을 받아 생기는 높은 자존감도 필요하고 좋은 인간관계도 필요하다. 누군가는 늘 우울하고 늘 자신이 없었다. 그러한 뒷배경에는 부모의 양육방식이 한몫을 한다. 충분히 공감하고 배려하는 부모가 있어야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라서는 타인을 충분히 공감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편견 없는 교육방식에 의해 앤디 워홀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소박하고 일관성이 있었다고 한다.




3. 앤디 워홀의 독창성



‘예술은 희귀한 것만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흔한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 ‘당신이 훔쳐 달아날 수 있는 모든 것이 예술이다.’ ‘돈을 버는 것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훌륭한 사업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예술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앤디 워홀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작품의 독창성은 예술을 따로 명명하지 않은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 예술가들은 예술을 고상한 것이라고 여기며 예술의 개념을 한정 지으려 하였지만, 그는 모든 것을 예술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로 앤디 워홀은 상업과 예술을 혼합하고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하였고 대중들의 큰 호응을 받으며 팝 아트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작품들을 통해 대중에게 일상생활용품 같은 주위 환경을 다시 돌아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미술도 미술관을 빠져나와 일상생활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미술이 화가의 개성을 표현하는 순수 미술이라는 개념에 반대하고 광고처럼 끝없이 되풀이되는 중복 이미지로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갖는 비개성과 복제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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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작품들처럼 캠벨 수프 통조림, 코카콜라와 같은 대중적이고 대량 생산 가능한 제품들을 작품 소재를 대량 생산 가능한 방식으로 그려낸 앤디 워홀은 팝아트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진실하다. 앤디 워홀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표현해냈다. 그는 유명한 것에 애정을 숨기지 않고, 스타와 정치인이나 사고, 패션 제품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으며, 그것이 유명하고 또 자기 자신도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그 자신이 미국의 유명인이 되고 나서도 걸음을 흩트리지 않고, 유명인들을 모티브로 작품을 연출하고 제작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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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앤디 워홀은 마를린 먼로, 마이클잭슨과 같이 유명한 인사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앤디 워홀은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을 없애고 표면을 강조하였다. 그의 말대로 작품에 비해서 그의 내면을 엿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생활을 드러내놓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아무도 모르게 노숙자들을 돌보는 봉사도 했으며 성당을 지날 때는 차를 멈추고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 나왔다고 한다.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개인사를 노출하지 않으며 오직 보이는 작품만 봐달라고 한 앤디 워홀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앤디 워홀이 항상 가면 속에 진실을 감춘 채 관찰자로 살았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작품에 솔직하게 표현했고 자신의 작품에 내면이 모두 녹아있기 때문에 뒷면이 없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앤디 워홀은 남다른 시선과 진실성을 가졌다. 21세기를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가 '다양성'과 '컨버전스'라면 워홀의 세계는 그 두 가지가 온전히 살아 움직이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능력을 갖춘 인재이면서 전공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과 여러 분야에 대한 넓은 상식,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조화롭게 골고루 갖춘 인재였던 앤디 워홀은 그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었고 현세와 후세에 명성을 날릴 수 있었다.

 

 



[윤혜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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