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제주 4.3 사건의 목소리, "지슬" [영화]

말없는 피조물은 의미되면서 구원을 희망할 수 있다
글 입력 2019.03.2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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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는 피조물은
의미되면서 구원을 희망할 수 있다

-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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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면 제주의 하늘이 보인다. 우리가 여행가서 보았던 제주의 모습이 아니다. 흑백으로 처리된 제주는 어둡고 쓸쓸하다. 군복 차림을 한 남자 둘이 연기가 자욱한 다 쓰러져가는 집에 있다. 그들 뒤로는 발가벗겨진 여인이 죽은 듯이 늘어져있다. 고중사와 백상병은 아무렇지 않은 듯 누군가를 죽인 제수용 칼로 사과를 잘라 나눠 먹는다. 폭력이 일상화 돼 어떠한 성찰적인 감각조차 남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화면이 바뀌면, 한 군인이 눈 내리는 겨울에 맨 몸으로 쪼그려 있다. 그는 빨갱이를 한 놈도 잡아오지 못한 죄로 백상병에게 벌을 받고 있다. 인천에서 온 새로운 신병은 이 광경이 알듯 말듯, 벌 받고 있는 군인을 도와주려 한다. 여기가 그럭저럭 참을만 하다는 신병에게 군인은 묻는다. “넌 사람 죽일 수 있어?”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성을 놓지 못했던 군인은 10대의 앳된 여성을 결국 죽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가 고중사에게 강간을 당하자, “그냥 죽일 걸 그랬어”라 말한다. 강간한 고중사 모르게 그녀에게 감자를 갖다 주지만, 자신이 성폭행 당하는 것에 침묵했던 군인은 그녀에게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군인을 죽이고, 사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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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군인을 피해 도망친다. 민간인을 보호하는 공권력을 두려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도 모른다. 도대체 빨갱이가 누구고, 폭도가 누구며, 어디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폭도가 있긴 있는거냐?"라는 말에, "폭도? 우리가 지금 폭도 때문에 이러고 있냐"라고 답한다.

무동은 다리가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동굴로 피하고 싶지만, 어머니는 한사코 거부하신다. 무동이 떠난 이후 군인들은 마을을 습격하고, 돼지를 죽인 칼로 어머니를 죽인다. 자신을 죽인 군인에게 어머니는 "나도 자네 만한 아들이 있네"라고 하자, 군인은 "내 어머니는 빨갱이 손에 죽었소"라고 답한다. 어머니는 다시 돌아올 아들을 위해 감자를 품에 안고 죽는다. 무동은 재로 변해버린 집을 보고 무너져 운다. 어머니가 남긴 말은 "빨갱이가 뭐라고"였다.

무고한 사람들을 '폭도'라 규정하고 미친듯이 살인한 고중사가, 자기 밑에 있는 병사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제 사람 그만 죽이세요"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지방지가 타오른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듯, 영화는 널부러진 제기와 타버린 지방지와 함께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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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지 않았다. 제주 토박이인 감독은 4.3사건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이념'으로 들었다. 이 사건이 이념의 문제로 양분되기 때문에 '사람'의 언어로 소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민간인을 학살했던 군인들에 대한 태도 또한 인간적으로 접근하길 원한다.

영화 속 고중사 같은 사람은 일제 강점시 때부터 전쟁으로 인한 살육에 익숙해져 있을 터였다. 삶이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 돼 버린 그들을 대변할 생각은 없지만, 화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젊은 군인들을 통해 대변하고자 했고, 총을 잡고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의 미묘함을 표현했다.

제주 4.3 사건을 추모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될 테다. 거대한 이념이라는 야만으로부터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며 추모하는 것. 이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들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다. 지배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억압받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구성되야 하는 것이다.

이념에 의해 무고히 희생당한 분들께 어떠한 정치적 배경도 말하지 않는 것은, '구성'의 첫 번째 조건이 '당사자의 목소리'라고 생각해서다. 영화 <지슬>은 당신에게 그 목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이다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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