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 크로키] 베라 드레이크: 나의 몸은 나의 것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의 삶을 지켜낼 권리가 있다.
글 입력 2019.03.2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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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CROQUIS]


놓쳐서는 안 될,
국내 미개봉 수작을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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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베라 드레이크> 포스터


키워드: 페미니즘, 낙태, 리얼리즘

사회, 비극, 가족, 덤덤한



▶ 감상 포인트


1. <비밀과 거짓말>로  칸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마이크 리의 작품.


2. 마이크 리의 작품은 대본이 없다. 배우에겐 상황과 역할에 대한 정보만 제공되는데 이점이 배우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마이크 리만의 연출 스타일이다.


3. 해리포터 속 엄브릿지의 모습으로 이멜다 스턴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그녀의 전혀 다른 모습과 무서운 연기력에 놀랄 수도 있다. 에디 마산과 샐리 호킨스의 15년 전 모습 역시 깨알 포인트.


4. 베니스영화제 황금 사자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오스카에선 각본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작품이지만 국내에선 미개봉. 2019년 제14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영화 <소공녀>의 감독 전고운의 선택으로 특별 상영되었다.




"여성에게 폭력적이고 보수적인 사회는

좋은 인간을 잃게 되어있다."


- 전고운 (영화감독)의 추천사




구원자, 베라 드레이크



포스터 속 이멜다 스턴톤의 모호한 표정과 [낙태]라는 주제는, 내가 이 영화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메시지를 기다리며, 단조로운 시간을 견뎌내야 하진 않을까? 하지만 나는 틀렸다. 마이크 리 감독이 재현해낸 세계 속으로 나는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어느새 나는 베라 드레이크가 웃으면 따라 웃고, 대신 머쓱해했으며, 함께 괴로워했다. 2시간 동안 나는 베라 드레이크가 살던 1950년의 영국, 바로 그곳에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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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베라 드레이크> 스틸컷


베라 드레이크로 내가 영화 속에서 만난 가장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등장한 그녀의 얼굴은 마치 우리 할머니처럼 푸근했고, 그녀의 앞치마에선 좋은 냄새가 날 것 같았다. 가족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두 다리, 시종일관 잃지 않는 웃음, 외로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자애로움. 이런 말들이 베라 드레이크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법 없이도 잘 살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베라 드레이크에겐 비밀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그녀가 아주 오래전부터 젊은 여성들에게 불법 임신 중절술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시술은 빠르고 간단하다. 필요한 건 따뜻한 물과 비누, 얇은 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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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라 드레이크가 사용하는 시술 도구



때는 1950년. 어떤 경우에도 낙태는 불법이다. 데이트한 남자와 강제로 관계를 맺게 된 수잔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한다. 혼전 임신은 '부정한 여성'이라는 낙인이며, 이후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 없음을 뜻한다. 책임은 오롯이 수잔의 몫이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파리한 얼굴로 의사를 찾아간다. 자신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지를 피력하며 그녀는 결국 임신 중절술 승인을 받아낸다. 비용은 무려 100파운드. 그래도 괜찮다. 아이를 낳지 않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100파운드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하층계급의 여성들은 기댈 곳이 없다. 그들의 구원자가 바로 '베라 드레이크'다. 작고 허름한 방, 파리한 얼굴로 베라를 기다리는 여자들. 그들의 어깨는 고독하다. 관계를 맺을 땐 두 사람이었는데 남겨진 건 혼자다. 그들은 베라에게 묻는다. 안전한 거 맞나요? 시술을 받다가 죽을 수도 있나요? 이제 전 어떻게 되나요?


겁에 질린 여성들을 바라보며 베라는 따뜻하게 웃는다. 날씨가 참 궂죠? 그리고 말한다. 내일이 되면 배가 많이 아파질 거고, 그때 화장실에 가면 하혈을 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나면 끝이에요. 괜찮을 거예요. 다 끝이라는 말에 여성들은 눈물을 흘린다. 시술을 받으면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다.


이야기는 순조롭게 흘러간다. 사건이 하나 생기기 전까지는. 이 이후의 이야기는 영화를 통해 확인하시길 바란다.  우리는 이제 이 오래된 이야기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유효하다는 끔찍한 얘기를 시작해야 하니까 말이다.




나의 몸은 나의 것, 내 삶은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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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Battle ground 269

ⓒ 한국여성민우회



영화의 배경인 영국은 현재 의사 두 명의 동의 아래 임신 24주 이내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며, 24주 이후에도 산모 건강, 심각한 기형 등의 예외사유를 인정한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낙태를 금지하며, 콘돔 사용률은 11%로 OECD 국가 중 콘돔 사용률이 최하위에 속하며, 허술한 피임의 책임을 오롯이 여성에게 단죄하는 구조다.


2012년 8월 낙태죄 관련 형법 270조 1항의 헌법소원 심판에서 당시 헌재는 "낙태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현재보다 훨씬 더 낙태가 만연하게 될 것"이라며 낙태죄를 위헌으로 선언했다. 경구약 ‘미프진’은 북한을 포함한 세계 119개 국가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WHO 필수의약품 등재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국에선 불법이다. 낙태가 쉬워지면 여성들이 피임을 게을리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낙태가 만연해지고 피임을 게을리하게 될 거라니. 얼마나 우스운 말인가. 박카스를 마시듯 미프진을 먹고, 충치를 제거하듯 낙태 시술을 받으러 갈 여성은 없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충분히 고민하고 아파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친 뒤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여성은 '임신'이라는 문제 앞에서 결코 가볍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건 우리의 몸과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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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Battle ground 269
ⓒ 한국여성민우회


작년 5월, 한국에서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한 공개 변론이 열렸을 때 법무부가 일으킨 파문을 기억한다.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에 대해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내용이 공개 변론 요지서에 적혀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성관계를 하고 싶으면 응당 그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면 묻고 싶어진다. 왜 여성만 그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가.


세상에 완벽한 피임법이란 없다. 조금이라도 생리가 늦어질 때의 불안감, 공포는 모두 여성의 몫이다.  게다가 남자친구가 콘돔을 거부해서 경구 피임약을 먹거나 루프 삽입술을 받는 여성들을 숱하게 보았다. 그들은 왜 그 모든 부작용과 비용을 감수해서라도 약을 먹고 시술을 받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임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과 삶을 지켜내고 싶기 때문이다.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난 아이는 ‘사생아’가 됩니다. 낙태하지 않고 애 낳으면 ‘미혼모’가 됩니다. 왜 책임지지 않는 남자를 지칭하는 말은 없습니까?


- 낙태죄 폐지 집회 자유 발언 中



내 몸과 삶을 지켜내는 일. 그 간단한 게 참 쉽지가 않다. 요새는 스텔싱 (stealthing, 성관계 중 합의 없는 피임기구 제거)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심지어 처벌도 안 된다. 처벌할 법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낙태는 불법인데 관련된 법은 너무나도 허술하다. 숭숭 뚫린 구멍이 너무 훤해서 눈물이 날 정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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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베라 드레이크> 스틸컷



'아기를 없애는 일을 해왔느냐'고 묻는 경찰에게 베라는 답한다.



전 여성들이 다시 생리를

할 수 있게 도와줬어요.



'당신은 낙태 시술을 해온 것이다.'라고 말하는 경찰에게 베라는 말한다.



당신은 그렇게 부르겠죠. 하지만 제가 한 건 그런 일이 아니에요. 젊은 여성들은 도움이 필요했고, 기댈 사람이 없었어요. 전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준 거예요.



낙태죄 위헌성 여부를 결정하는 헌재 결정은 올해 4월 발표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시기에 낙태/ 여성의 삶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베라 드레이크>는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누군가 페미니즘을 묻는다면 나는 이 영화를 권유하겠다. 그리고 "산모 인생보단 태아의 생명이 귀중하다"든가, "낙태죄 폐지를 원하는 여성은 성교는 하고 싶되 그 결과는 책임지기 싫어하는 사람"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겐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 나오는 의자에 앉혀두고 보게 해주고 싶은 영화다.


내 몸과 삶은 나의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의 삶을 지켜낼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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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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