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카스테라 -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도서]

개미만 원하는 사회에게 하는 말
글 입력 2019.03.2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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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라는 덫에 빠지다

동대구역에서 영등포역으로 가는 기차 안, 박민규 작가의 단편 소설집 ‘카스테라’ 중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를 읽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더니 내용 또한 오묘한 느낌을 주었다. 소설 속의 너구리라는 존재에 대해 한참이나 생각했다. 이러한 점이 박민규 작가의 성격인가 보다. 글은 술술 읽히는데, 다 읽고 난 후 소설의 상징적 의미라는 덫에 하염없이 빠지도록 만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장치, 매개체에 대한 상징적 의미. 곰곰이 돌이켜보면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이후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제였다. 그리고 자의로 생각해본 적은 더욱더 없었다. 오직 시험을 위해 이해하고 암기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속 너구리는 수수께끼 같았다. 답을 알고 싶었지만, 왠지 스스로 생각해서 정답을 말하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꽤 오래 너구리의 의미를 생각했다. 대충 이 동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긴 했으나 정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정해진 답이라기보다 그저 필자의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딱 떨어지는 정답은 애초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독자가 소설을 통해 작은 생각이라도 했다면 그게 이 소설의 정답이 아닐까.



단 한 마리의 너구리도 허용되지 않는 세계


너구리잖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결국 사람들은 손 팀장을 피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눈의 기미는 짙어갔고, 날이 갈수록 그는 너구리에 가까워졌다. 치료책은 없나요?

없어, 아쉽게도 말이야. 부장의 답변은 심플했고, 그런 심플한 이유로 손 팀장은 완전한 열외가 되었다.


소설 속 손 팀장은 회사 내에서 실적이 부진하다가 퇴사하고 마는 인물이다. 부장은 그런 그를 두고 너구리라고 지칭한다. 너구리가 된 손 팀장에 대한 부장의 시선은 부정적이었다. 소설 속 ‘나’에게 손 팀장이 너구리 광견병에 걸렸다고 말하거나, 너구리는 모든 기업의 적이라고 비난했다.

이처럼 부장이라는 인물은, 경쟁에서 자의 혹은 타의로 벗어난 너구리들을 몰아가는 하나의 사회인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과 충고 그리고 불안하고 따가운 시선들. 이러한 것들을, 너구리들은 사회 속에서 묵묵히 견뎌야 하는 존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우리는 너구리의 가치관과 부합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무조건 열심히 달려서 누구보다 빠르게 결승선에 도착해야 한다. 쉬어가거나 중도에 포기하면, 어느 순간 한심하고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만다. 어릴 적 ‘토끼와 거북이’라는 동화를 너무 많이 읽었던 탓일까. 결승선에 늦게 도착하거나 이르지 못했을 때는, 격려의 박수보다 한숨 어린 눈동자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너구리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다.



안녕하세요, 너구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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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은 두 가지야. 너구리인 채로 도망을 다니거나 아니면 쉽게 너구리를 포기하거나. 너의 팀장은 아마도 너구릴 숨긴 채 살아온 인간이었을 거야. 물론 힘들었을테지.


생각해보면, 필자는 영락없는 너구리다. 휴학 중이며 아르바이트도, 뚜렷한 공부도 하지 않고 있다. 일상에서 하는 그나마 보람 있는 일이 있다면 지금처럼 글을 쓰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휴학을 선택했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금도 따가움 속에서 살고 있다. 또래보다 뒤처질 것이라는 남들의 걱정 때문에 필자 또한 자신을 따갑게 대했다. 스스로 내린 선택에 대한 부담은, 어릴 적 팔에 난 아토피 자국에 소금이 닿았을 때보다 훨씬 더 아팠다. 그래서 고작 한 학기 휴학임에도 자격증을 만들거나 토익 점수를 올리는 등 무언가를 일구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곤 했다.

이처럼 필자는 너구리지만 너구리임을 인정하기 싫은 사람이었다. 주어진 선상에서 경쟁하는 것을 도망쳤지만, 그 도망에 대해 스스로 완벽히 떳떳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런데 너구리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서 벗어나 온전히 너구리로서의 삶을 즐겼을 때, 필자는 참 행복하다. 너구리가 아닌 한 마리의 개미였을 때 느꼈던 추한 열등감, 해로운 승리 욕구와 같은 감정들에서 해방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내 속에 너구리 한 마리쯤 있으면 어때’라고 마음먹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너구리로 살아가기는 참 쉽지 않다. 너구리로 살고 있어도 너구리가 아닌 척해야 그나마 견딜 수 있다. 휴학한 후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아무것을 한다고 말하는 필자처럼 말이다. 그래서 ‘저는 개미입니다’보다 ‘저는 너구리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욱 존경스럽다. 이들은 너구리로서 마주할 눈들을 감당하려고 각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각오했다 한들 너구리들은 상처받을 것이다. 그러니 나 하나쯤은 따갑고 차가운 시선을 거두어도 되지 않을까. 앞으로 만날 누군가가 너구리라면, ‘안녕하세요, 너구리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따뜻하게 바라봐야겠다.


[황채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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