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자유와 진실은 같지 않으니 _ '굴레방다리의 소극' 비평

윤지오 씨를 도와주세요
글 입력 2019.03.22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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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아는 것과 자유로운 것은 동의어일까? 배우 장자연의 사건만 보아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뉴스와 인터넷으로 윤지오님을 지켜보며 진실과 자유는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깊이 체감하고 있다. 방금 언급한 진실과 자유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작은 지하의 한 고립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이야기가 펼쳐지는 연극이 있다. 바로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굴레방다리의 소극>이라는 작품이다. 3월 30일까지 펼쳐질 예정이라고 하니, 볼 의향이 있으신 분은 빨리 가보는 게 좋겠다. 이번 글은 <굴레방다리의 소극>이라는 연극에 대한 구조적 분석과, 비평을 다룬다. 연극의 구조는 한철이와 두철이(두 아들)와 김리(마트 직원), 세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분석했다.


 

*

연극을 보신 분이거나,

혹은 앞으로 보실 분이거나,

혹은 자유와 진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이글을 보십시오




들어가기 전 연극에 대한 짤막한 소개



(비평자가 주관적을 담아 플롯을 정리하였기 때문에,

이 글을 읽어주시면 앞으로의 글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굴레방 다리(아현동)에 존재한 어느 허름한 지하방이 있다. 그 곳에서는 매일같이 똑같은 연극이 펼쳐진다. 관객도 없고, 스테프들도 없다. 세 명의 연극배우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이 매일 극에 올리는 레파토리는 동일하다. 바로 그들이 연변을 떠나기 전날 '할머니의 장례식'에 있었던 사건. 아버지와 두 아들로 구성된 그 연극은 그렇게 똑같이 반복되고 극에 올려진다.


어느날 문제가 생긴다. 바로 마트에서 연극 소품을 사오는 동생 '두철'이가 봉지를 바꿔들고 온 것. 완벽한 재현을 바라는 아버지에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상황이며, 분노다. 아버지에게 앞의 이유로 폭력을 당한 두철은 형 한철에게 자신이 마트를 오고가며 본 '바깥세상'에 대해 말한다. "형 바깥에 나가자"


바로 그날 밤, 우여곡절을 겪으며 연극을 이어가고 있던 세 부자의 집에 누군가가 찾아온다. 마트에서 두철이가 매일 연극 소품을 사가며 마주쳤던 마트 직원이다. 김리라는 이름의 몽골 외국인 노동자인 그녀는, 두철을 좋아한다. 그때부터 비극은 시작이다. 연극의 연출이자 주최자인 '아버지'는 바깥 세상을 경계하고 두려워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찾아온 김리에게 폭력을 가하고, 요리나 하라며 윽박지른다.


동생 두철은 바깥세상에 대한, 그리고 '연극에 대한 진실'을 아는 자다. 실제 있었던 일에 아버지의 상상대로 꾸며지고 고쳐진 연극을 반복하며, 진실을 아는 두철은 바깥세상을 꿈꾼다. 그에게 찾아온 '김리'는 그런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자다. 하지만 형은 다르다. 형은 '연극의 진실'이 무언지, '바깥의 진실'이 무언지 아는 바가 없다. 동생과 김리라는 사람의 말로만 진실을 알아가고 추측해갈 뿐이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하며 아버지는 두철을 설득한다. "이 연극만 끝내면, 저 여자애를 풀어줄게", 두철은 진실을 속에 묻고 연극을 반복하기로 한다. 그런 그의 다짐을 없애버린 자가 있었으니, '형 한철'이다. 그는 창문의 햇볕을 통해 진실의 밝음을 깨닫고, 아버지를 죽인다. "연극을 끝내세요 아버지!" 그의 연극은 동생에게 죽임을 당한 뒤에 완결이다. "잘했어 잘했어" 일부러 동생이 사랑하는 김리를 해하는 척을 하며 동생에게 칼을 받아낸 한철은 그렇게 말한다. 김리는 사랑했던 두철을 두고 도망간다. 자신 앞에 벌어진 광경을 참아내지 못하고다. 혼자 남겨진 두철은 그의 처음의 바람대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저 김리가 열고 나간 문의 자물쇠를 다시 걸어잠그며 한 사람, 자신이 사랑했던 김리의 역할이 추가된 연극을 다시 반복할 뿐이다.




비평의 시작



이 연극에서 '자유'와 '진실'이라는 두 축을 위해 눈여겨 봐야 할 것은 한철과 두철, 그리고 김리다. 아버지를 제외하는 이유는, 그가 자발적으로 자유를 배제하고 진실을 만들어내는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살펴 볼 것은, 배제된 자유 앞에서 '자유'를 찾아나서는 인물의 다양한 태도들이다.




한철과 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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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비되는 두 인물은 아들들, '한철'과 '두철'이다. 두 인물은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세뇌당하며 같은 일을 함께 반복한다. 한철과 두철의 차이점은, 한 명은 진실을 알지만 한 명은 무지한 상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과 자유에는 어떠한 직관적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자유로 나아간 인물은, 다름 아닌 무지몽매의 상태에 있던 '한철'이었으니 말이다.


소극적 지식인으로 비유될 수 있는 동생 '두철'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는 자다. 아버지가 재산을 위해 자신의 동생과 그의 부인을 죽인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연변을 떠나 지금의 '굴레방다리' 집으로 온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반복된 연극은 모두 아버지의 자기변론이며, 가식과 허식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품고 있을 뿐 밝히지 못하는 자다. 불의의 절대자인 '아버지'에게 말하지 못하며, 마트에 나가며 지속적으로 진실을 습득하지만 적극적 탈출은 꿈꾸지 못한다.


그에 비해 '한철'은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한 자다. 연극의 진실이 무언지, 연극의 원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날 '연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깥 세상은 어떠한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가 알고 자란 것은, 모두 아버지가 꾸며낸 허식의 '굴레방 다리의 소극'과, 자신과 같은 자들을 잡아간다는 '무서운 바깥세상의 이미지'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점점 현실을 알게 된다. 연극의 진실과 김리를 통해 들은, 바깥세상의 실제 모습을 통해 가짜와 진짜를 구분해 나간다. 그에게 각성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굴레방 다리 집'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빛이다. 지금껏 세상은 지하의 집처럼 어둡기만 한 줄 알았던 한철은 그 길로 아버지를 죽인다. 연극을 끝내기 위해서다. 이런 점에 있어서, 그는 결국 '적극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극의 유일한 관객, 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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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굴레방다리의 소극>은 연극무대인 '굴레방 다리의 집'에 한명의 이방인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구조이다. 이 말은 아버지와 두 아들, 김리 중 '극 중 극'을 관람하는 관객은 한 명의 이방인 '김리'뿐이며 다른 모든 자는 극중극의 속에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연극의 유일한 '관객'의 등장은 굉장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방인이자 관객인 김리는 바로 '실제 현실'(진실)에 살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관객'의 등장은 연극에 상대성을 부여하여 그들의 비극을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인식하게 만들고 연극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초반부부터 등장한 세 부자는 모두 극중극의 관련자들이기 때문에, 연극에는 극중극과 일상의 어떠한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연극에 '관객'이 등장하게 되며, 극에는 연극(극중극)과 현실의 어떠한 경계선이 생긴다. 이 경계선은 연극과 현실 사이에서 두철을 폭발적으로 고뇌하게 만들며, 긴장을 더더욱 고조시킨다. '자유'를 되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리는 굴레방 다리의 집에서 어떠한 '각성제'와 '열쇠'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다. 그녀의 역할은 "두철 여기 너무 어두워, 밤 같애"라는 말을 통해 더더욱 분명해진다. 이 말은 곧, 두 아들에게 그들만의 세상이 현실보다도 어두컴컴한, '고립된 섬'임을 인지토록 한다.




자유를 찾은 자는 누구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진실 인식과 자유 성취는 다른 것이다. 진실을 인식하는 것은 자유를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의 하나의 요건일 뿐이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연극의 마지막에서 결국, 세 인물(한철, 두철, 김리)은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진실을 얻고, 자유까지 얻은 자는 누구인가.


김리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원래 자유로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 연극이라는 '구속' 상태에 제발로 들어갔던 김리는 결국 다시 자유를 향해 뛰쳐나간다. 그 성취가 공포심에 의해서였는지 사랑의 소멸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상관 없다. 그녀는 근본적으로 '속박상태'의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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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에서 가장 큰 성취를 이룬 자는 '형 한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철에게 자유는 바깥으로의 탈출이 아니라, 속박(연극)의 완결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기변명 속에 아들들을 가두고, 허식의 세상을 만들어낸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연극을 완결맺는다. 아버지를 죽인 후의 한철의 외침으로서 연극의 완결은 더 공고해진다. "연극을 끝내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한철의 대답에 답하지는 않았지만, 연극이 끝난 후 수여되는 트로피를 건네받음으로서 연극의 종료를 알린다. 속박과 자유의 제한을 의미하던 '연극'은 한철의 손에서 끝이 난다.


자유를 찾은 김리와 한철에 비해, 자유를 성취하지 못한채 심지어는 자기 속박에까지 이르는 인물은 '두철'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두철은 인물들 중 가장 소극적이며, 한계적인 인물이다. 두철은 처음부터 모든 진실을 알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의 '자유', 탈출을 찾아나서지 못한다. 모든 것을 결심하고 나서기로 마음 먹지만, 결국엔 자신의 연인 김리를 위해 재속박을 택한다. 이는 '계약'에 의한 재속박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 가능하며, 극단적 소극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형 한철이 절대자 '아버지'를 죽이고, 짐이 될 수 있는 자신까지 죽음에 이르게 한 뒤에 벌어지는 '완전한 자유'에서 문을 열고 나아가지 못한다. 모든 자유의 요건이 주어졌을때에도, 자유를 찾아나서지 못하고 새로운 인물이 추가된 두철의 모습은 그의 아버지와 같다.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이르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허식에 둘러쌓인 고립을 택하는 것. 이는 곧 결국엔 아버지는 죽었지만, 새로운 '아버지'가 등장한 것이며, 한철에 의해 연극은 끝났지만 두철에 의해 새로운 연극이 시작되었음을 역설한다. 진실 없는 연극은 언제나 고립이며 속박이다.





비평의 끝



너무도 개연적인 현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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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에서 안타까웠던 점을 고르자면, 김리가 자유 없는 두 아들을 현실 밖으로 나아갈 문을 열어주지 못한채 자신 혼자 탈출을 했다는 것과 형 한철이 생각한 '자유'에 자신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것은 개인적인 안타까움이지 결코 연극의 부족함은 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개연적이며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연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의 비극성을 잘 보여주어, 관객들로 하여금 우리가 몸담은 현실에 대해 인식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들이 자유를 찾고, 연극을 펼치고, 서로를 죽이던 현실도 결국 관객들에겐 처음부터 몸담고 있었던 현실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소극인'인 두철은 염상섭의 <만세전>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속의 '나'는 현실에 대한 완벽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엔 그 인식을 혹은 자신이 아는 자유를 실현시키지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결말부분에선 처음 자신이 위치했던 곳(만세전에서는 일본, 연극에서는 소극)으로 돌아가게 되며 회귀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유사함을 보인다.


이 연극의 주제가 현실의 비극성을 느끼게 하는 데에서 그치지만은 않을 것임을 믿는다. 혹은 비인간적으로 '굴레방 다리 삼인방의 비극'을 그만치 눈에 띄는 비극없는 당신네의 처지를 인식하라고 하는 것은 아님을 확신한다. 그것보다 이 연극은 우리들에게 극중극과 네 인물의 비극적 결말의 관객으로 초대해, 비극을 없애줄 적극적 지식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너무도 현실적인, 너무도 개연적인 이 연극 속의 유일한 관객 '김리'는 실패했지만, 아마 이 연극 밖의 관객들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을테다. 진실을 알고 자유를 얻기 위해 나선 '윤지오'씨를 도와주기를, 혹은 고립된 문화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굴레방다리의 사 인방'에게 진실과 자유를 찾아주는 열쇠가 되어주기를 말이다.





[손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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