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팔이] 12화: 안녕, 사랑했던 나의 과거야
나중에 분명 왜했나 싶을 고백
글 입력 2019.03.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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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안녕, 사랑했던 나의 과거야
A와 난 CC였다. 헤어진 지 일 년도 넘은 지금 와서 이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 다소 구질구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더 이상 소재가 없다. A, 넌 내 마지막 보루다. 정작 당사자는 본인이 전 여친의 글감이 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겠지만. 역시 어쩔 수 없다. 이건 글 쓰는 전 여친을 가진 너의 업보다.우린 CC였다. 난 그 높다는 경쟁률을 뚫고 교양과목 ‘영화와 공연예술(영공)’ 수강신청에 성공했고, 독강이 싫었던 나는 새내기 단톡방에 ‘00교수님 영공 들으시는 분 카톡 주세요..><’라고 남겼다. 그렇게 난 너와 만났다.처음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너한테 카톡이 온 걸 보고 좀 놀랐다. 사실 난 이미 널 알고 있었다! 이제 막 대학생 된 스무살이 할 일이 뭐 있겠나. 집에서 뒹굴거리며 단톡방 속 사람들의 모든 프사를 눌러봤고, 그 중에서도 너는 유독 눈에 띄었다. 잘 생겨서. ^^ 나는 바로 얼굴책에 너의 이름을 검색해봤고, 그렇게 난 잘못하다 좋아요를 누르는 대참사를 방지하기 위해 손톱으로 액정을 긁다시피 하며 너의 타임라인을 염탐했다. 해서 난 이미 널 대충은 알고 있었다.그렇게 너에게 연락이 왔고, 난 이 기막힌 우연에 감복하며 영공 OT에 갔다. 실제로 만난 넌 약간의 프사기(!)가 있었다. 그래도 실망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전혀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어디서 왔어? 정시야, 수시야? 통학해?▲ 영화 ‘건축학개론’. 물론 제가 수지라는 건 아닙니다.수업에서 아는 사람이 너 하나뿐이었기에 난 널 자연히 친근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래도 인간적인 호감 정도였지, 이성으로서의 마음까진 아니었다. 해서 난 너와 밥을 먹고, 치킨을 먹고, 술을 먹고, 그 사이 여친이 생긴 너에게 썰을 풀라며 종용했고, 그러다 헤어진 너에게 또 다시 썰을 풀라며 종용하고, 그러다 내가 남친이 생기고, 그러나 나도 헤어지고, 그래서 위로나 해달라고 너를 불렀다. 그렇게 우리는 다이다이를 뜨며 술원결의를 맺었다.그러나 어느 순간 내 마음이 조금씩 움직였던 것 같다. 잘생기고 매너도 좋아서 인기까지 있는 너를 일종의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토록 멋진 너의 옆에 내가 서면 나 역시 조금은 멋있어질까, 그런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따지자면 동경이랄까.해서 난 너와 또 술을 마셨다. (?) 술을 마시면 당당해지는 내가 좋았다. (??) 지금으로 치면 충분히 혼자서도 감당 가능한 취기에도 신난다고 정신줄을 놔 버렸고, 때문에 너는 매번 욕을 퍼부으며 나를 집 앞에다 던져 놨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술김에 너한테 마음을 고백했고, 그렇게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하지만 너와의 연애는 쉽지 않았다. 다른 게 아니라 나 때문에,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자격지심’ 때문에 쉽지 않았다. 넌 잘생겼고 키도 크고, 학창시절에 운동을 해서 몸도 좋았다. 목소리도 좋았고 매너도 좋았다. 해서 너의 주위엔 항상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외모도 평범했고, 그렇다고 성격이 그렇게 핵인싸인 것도 아니었다. 너처럼 드라마틱한 과거도 없었고, 너만큼의 자신감과 확신도 없었다. 나에겐 너의 모든 것이 동경이었다.▲ 대학교 익명 커뮤니티 ‘대나무숲’. 전설의 에피소드.그런 나였으니 대숲에 너를 찾는 글들이 올라왔을 때 뒤집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인상착의를 묘사하며 너의 이름과 학과를 묻는 글들이 대숲에 종종 올라왔고, 용케도 그것이 너임을 알아챈 동기들이 댓글로 널 소환할 때마다 난 여유로운 척, 속으로는 게거품을 물었다. 널 뺏길까봐, 뭐 그런 게 아니었다. 넌 이토록 인기가 많은데, 난 그렇지 않다는 게 분한 거였다.해서 내가 뭘 했게?다소 민망하지만 고백하겠다. 난 한 3번? 정도의 대숲조작을 했다. (ㅋ) 뭐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직접 날 찾는 듯한 익명 제보를 보내는 것이었다. (ㅋㅋㅋ) 그런데 더 웃긴 건, 동기들이 아무도 그 제보 속의 인물이 나일 거라고 눈치를 못 채서 소환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버린 적도 있다. (ㅋㅋㅋㅋㅋ) 그 시절의 나에게로 돌아가 돌려차기를 날리고 싶은 흑역사이지만 그 때 당시에는 정말로 진지했다.하여튼 그로 인해 너와 나 사이에서는 몇 번의 대화가 오갔다. 넌 약간 질투 비슷한 걸 했던 것 같고, 난 통쾌함과 불안감이 뒤섞인 다소 고차원적인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고백한다. 미안하다. 그거 다 나였다.약간 진지한 톤으로 돌아가자면, 그 시절의 난 자존감이 낮은 편이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말과 행동과 표정을 통제하려 했지만 많은 경우 실패했고, 해서 ‘이제 이 사람이 날 바보로 보겠구나’ 생각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넌 머지않아 나의 그러한 점을 눈치챘고,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겠다며 다방면으로 노력했다.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너와 헤어진 후에야 비로소 자존감을 높일 수 있었다.
그 시절 난 어렸고, 너 역시 어렸다. 너와 함께라면 모든 게 가능할 거라고 믿었던 난 분명 어렸고, 누군가의 자존감을 네 힘으로 높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너 역시 치기 어렸다. 나의 자존감은 너도, 그 누구의 손도 아닌 오직 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기엔 너와 난 아직 인생살이에 서툴었다. 자존감을 높이고 싶어? 그럼 높여. 그건 오직 너만이 할 수 있어. 다만 난 네가 성공할 거라고 믿고, 언제나 널 응원할거야. 그러니까 넌 힘들 때 내게 와서 쉬어 가면 돼, 라고 말했더라면 좋은 대답이 되었을까. 하지만 넌 자존감이 낮다는 나의 말에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라고 대답했고, 그건 2년여동안 너와 내가 함께 만들어낸 수많은 실수 중 하나였다.너와 헤어지고 후회와 미련과 분노가 혼재한 몇 개월을 보내다가 난 뭐라도 해보자며 인생의 계획들을 세우기 시작했고, 작은 목표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겨 가면서야 비로소 부동이던 나의 자존감은 상승세를 보였다. 너 이외에도 즐거운 일들이 생겼고, 직접 성취해낸 것들이 생겼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냈고, 가끔은 인정도 받았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너와의 이별은 날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전에는 스스로를 믿어주고 존중해주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이건 뭐, 이별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하여튼 넌 날 의도치 않게 성장시켰다.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난 CC의 부작용을 몸소 느끼며 너와 같은 캠퍼스를 거닐고 있다. 친구가 많이 겹치는 덕에, 그리고 그 친구들이 너와 나의 관계를 웃음거리로 승화시켜주는 덕에 난 오히려 약간의 서스펜스를 동반한 자학개그를 펼치며 재밌게 학교를 다니고 있다.그리고 마찬가지로 친구가 많이 겹치는 덕에 원치 않아도 너의 소식을 듣게 된다. 헌데 너의 소식을 들어도 예전과 달리 자격지심이 느껴지지 않는 건 너가 못나졌기 때문일까, 내가 잘나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 역시 잘났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일까.아무래도 가장 마지막인 것 같다.▲ NETFLIX 오리지널 ‘먼 훗날 우리’너와의 시간은 날 성장시켰다. 이를 깨달은 지금, CC는 썅놈, 썅년의 줄임말이라는 희대의 명언에도 불구하고 난 오히려 너와의 시간이 좋게 기억된다. 아마 별 일이 없는 한, 난 그 시절 널 사랑했던 날 평생토록 사랑할 것 같다.잘 살아라. 그 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 넌 잘 살 자격 있다. 물론 내가 너보다 조금 더 잘 살 테지만 (^^) 그래도 너도 잘 살길 바란다.잘 살아라.안녕, 사랑했던 나의 과거야.
[박민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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