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암흑과 침묵 속에서 맞닿는 기척 [도서]

그는 여전히 그녀를 모르고, 맞닿은 입술이 영원히 어긋나는 세계에서
글 입력 2019.03.13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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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이 거대한 세계를 한 장의 얇은 종잇장 안에 가두는 법을 배우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입체파 화가 피카소가 가장 좋아하던 일 중 하나는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른들이 산을 삼각형으로 그리고 집을 사각형으로 그리는 것을 알기 전, 아이가 만나는 3차원의 세계가 처음으로 2차원의 도화지 안에 오롯이 담기는 순간들. 피카소는 낡은 표현을 주워 입지 않은 스케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선과 색에 매료되었다.


지금부터 소개할 소설 <희랍어 시간>은 피카소가 사랑한 순수하게 지각된 세계, 즉 언어라는 낡은 틀에 의해 으스러지기 이전의 세계와 눈이 멀어 볼 수 없는 상처에 대해, ‘말’을 잃은 여자와 ‘눈’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로 정갈하게 풀어낸다.




언어와 시각, 그리고 그 바깥을 부유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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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출간된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어버린 한 여자와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주인공이 되어 둘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 장편 소설이다.



눈물이 흘렀던 길에 지도를 그려뒀더라면, 말이 흘러나왔던 길에 바늘 자국을, 핏자국이라도 새겨뒀더라면.


하지만 너무 끔찍한 길이었어.



당신의 아버지가 예고했던 마흔 살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 나는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일이 년쯤은 더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더디 진행되어온 일이므로, 마음의 준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허락 받은 담배를 가능한 한 오래 피우는 죄수처럼, 볕이 좋은 날이면 집 앞 골목에 나가 앉아 긴 오후를 보낼 뿐입니다.


여자가 잃어버린 ‘언어’와 남자가 잃어가는 ‘시각’은 각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표현수단이며, 인식수단이다. 먼저 ‘언어’는 핵심적인 표현 수단인 동시에 세상을 인식하는 체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자는 언어 없이 생각하며,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단어들을 잠가버린다. 한편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안경과 희미한 빛에 의존해 생활한다. 소설은 표현과 감각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잃어버린 두 주인공을 통해 언어의 한계와 시각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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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순술 수업에서 배운 대로, 무슨 말이든 나에게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은 주의 깊게 내 입술을 들여다보았고, 멍한 시선으로 내 눈을 마주 보았습니다. 나는 찬찬히 더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함께 살게 될 것이고, 나는 눈이 멀 것이라고. 내가 보지 못하게 될 때, 그때는 말이 필요할 거라고.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이야기는 남자의 과거로 돌아가 그가 첫사랑에게 안부를 물으며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남자의 첫사랑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농인으로, 그들은 서로 필담을 나누며 대화한다. 그러나 어느 날 남자는 그의 첫사랑에게 자신이 눈이 완전히 멀게 되면 말이 필요할 테니 말을 건네줄 수 있냐고 부탁한다. 그 말에 몹시 화가 난 그녀는 힘겹게 뗀 ‘당장 나가’라는 말로 남자를 내쫓고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않는다. 남자가 겪은 실연은 자신의 사랑에 눈이 멀어 상대방의 상처는 보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인해 벌어진 결과이다. 더 깊게 사랑하고 더 많이 가까워질수록 상대방을 알 수도, 볼 수도 없게 된다. 따라서 과거의 남자는 아직 시력을 잃지는 않았지만, 눈이 멀어버린 것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일기장 뒤에 적어가던 단어들은 스스로 꿈틀거리며 낯선 문장을 만들었다. … 중략 …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 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세 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 한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말을 잃은 여자의 이야기는 백지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적으며 끝이 난 그녀의 마지막 상담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자신이 내뱉는 낯설고 낡은 문장과 말에 고통을 느낀다. 끝내 그녀는 세 치의 혀에서 나오는 헐겁고 미끄러지고 찌르는 단어들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언어 없이 생각하고 어떤 것도 그녀 안에서 새어나가지 않고 스며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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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감정을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파편으로 다가와,

파편인 채 그대로 흩어진다. 사라진다.


단어들이 좀더 몸에서 멀어진다.

거기 겹겹이 무거운 그림자처럼.

악취와 오심처럼.

끈적이는 감촉처럼 배어 있던 감정들이 떨어져 나간다.

오래 침수돼 접착력이 떨어진 타일들처럼.

자각 없이 썩어간 살의 일부처럼.


생각을 언어로 번역할 때 생각은 낡은 관습을 주워 입으며 뭉개지고 빛을 잃는다. 피카소가 사랑했던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그린 세상이 담긴 도화지 같은 순수한 감각의 세계는 언어라는 거대한 관습에 순식간에 삼켜져 가장 널리 유통되는 방식으로 가공된다. 그리고 이렇게 흘러나온 말은 처음의 상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단어의 표면에 붙어 있던 감정은 누군가 다그치기만 해도 쉽게 부스러지고 녹아내린다. 이렇게 ‘쇳냄새가 나는’ 언어들로부터 도망친 여자에게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실어증으로 일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명석하고 아름다운 결론’ 어딘가에 존재하는 불편한 것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있는 한, 그녀는 세상과 그녀 사이에 놓인 장검 뒤에서 숨을 죽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가 말을 잃은 논리적인 이유를 과거의 상처에서 찾으며 그녀를 이해하고, 낫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은 심리치료사의 노력이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이토록 어리석고, 이토록 절망 속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영혼은 파괴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딘가 망가지고 어긋난 채로도 삶은 계속된다. 삶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영화의 엔딩에서 별안간 찾아오는 암흑처럼 기별 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고, 존재도 퓨즈가 끊긴 전구의 빛처럼 한순간 꺼져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이 사실을 잊고 두려움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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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어떤 말도 그녀는 듣지 못했다. 어떤 타인의 내부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더 이상 허공을 더듬지 않는 눈, 오래 혼자서 말한 사람의 눈, 단 한 번도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의 눈을 그녀는 본다.


아니요.


첫 버스를 타고 갈게요.


그러나 하루의 경계가 모호한 일상 속 고독과 외로움도 연속성을 가진다고 믿어 버리는 시절에도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새벽 내내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여자는 ‘어떤 말도 듣지 못했고, 어떤 타인의 내부도 들여다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혼자서 말하고 허공에 묻던 남자에게 처음으로 대답한다.



내가 말했지, 언젠가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 거라고.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그는 잠에 빠져들어 조각난 어절과 이미지, 감각 속에서 유영한다. 그것은 ‘명석하고 아름다운 결론’의 어딘가에 구겨져 있던 ‘성립 불가능한 오류’의 세계,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오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그와 그녀는 끝내 이해할 수 없고 어긋나고 마는 입술과 심장을 맞대고 온기를 나눈다.



그때는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 세계가 감기는 거겠지요.



마침내 첫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마침내 그와 그녀는 도착하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던 장소에 닿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뜬다. 마지막 장이 넘겨지고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모든 것은 그대로이며, 일상은 마찬가지로 흘러간다. 아주 태연하고 천연스럽게.






<희랍어 시간>은 내가 읽은 모든 책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책이다. 어리석고, 낡고, 헐거운 것에서 오는 감정을 다룬 소설이기에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 가는 것이 힘겹고 어렵게 느껴진다. 결국 사랑하는 책을 다루면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미처 적지 못하는 역량부족에 속상한 마음도 든다.


소개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만약 이 글을 읽고 <희랍어 시간>이 읽고 싶어졌다면, 꼭 여름의 밤과 새벽에 읽어주기를 바란다. 내가 여름날 <희랍어 시간>을 읽으면서 느꼈던 조용한 온기와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뭉클함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고, 세상 모든 사람이 이 감정을 같이 느껴줬으면 좋겠기 때문이다.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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