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커서 사람이 되고 싶다. [공연예술]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
글 입력 2019.03.0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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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_ 부끄러움의 시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윤동주의 서시를 모르는 한국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동주>에서도 보여주듯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적인 시대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아픔의 시를 쓰던 시인 윤동주는 부끄러움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 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에서도 그렇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후쿠오카의 형무소에서 시 <팔복>을 읊으며 시작하는 극은 수줍음 많지만, 여느 청년들과 다름없이 첫사랑을 하고 친구들과 거리를 쏘다니며 노니는 청년 윤동주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상처받지 않은 듯 아무렇지 않게

어두운 인생 같은 블랙커피 한잔 손에 들고

사라질 미래 같은 궐련 담배 하나 입에 물고

어디를 향해 우린 걸어가는가

누구를 위해 우린 살아가는가


-경성, 경성



동주와 몽규, 처중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살아간다. 언뜻 그들은 평범한 청춘을 즐기는 것도 같지만 그들이 살아 숨 쉬는 시대가 어디 보통 시대인가, 화려해 보일지라도 그들이 거니는 거리가 마냥 행복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라고 말하는 그들은 시를 쓰고, 전단을 붙이고, 시위를 한다. 시를 쓰는 윤동주는 계속해서 부끄러워한다. 시위를 하다 총상을 입은 처중 앞에서, 배움의 기회를 위해 창씨를 개명할 수밖에 없는 자신 앞에서 그는 괴로워한다.


운명처럼 만난 첫사랑 선화의 ‘시를 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격려에 위안을 얻으면서도, 일본에서 친구와 추억이 될 만한 시간을 보내며 그는 여전히 이렇게 행복하다가 천벌을 받을까 두렵다 털어놓는다. 그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솔직하다. 솔직하기에 그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시를 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참회록





공감_ 나는 이미 너무 괴롭다.



무대는 참으로 서울 예술단답게 매워진다. 단원 여럿이 나와 대열을 맞춰 함께 춤을 추고 합창을 한다. 민족정신과 민족 교육을 탄압하는 일제에 저항하여 시위하는 대학생들과 처중이 함께 부르는 넘버에서 그런 서울 예술단스러움이 특히 두드러진다. CJ토월극장의 깊이도 적절히 사용했다. 그 깊은 무대 위를 달려 나오고, 달려 들어가고, 여러 층위로 나누어 사람들이 종횡무진 오간다.


그 사람들의 움직임 사이에서 나는 괴로웠다. 이 극은 내게는 너무 괴롭다. 고통스러운 극이다. 하기야 일제강점기를 관통한 저항 시인의 삶을 그린 극인데 괴롭지 않다면 그것이야 말로 문제일테다. 그럼에도 내가 느낀 괴로움이 고통인 이유는, 그것이 인물을 통한 공감이 아닌 오롯이 내게로 생생히 전달되는 끔찍함이었던 탓이다.


2막의 긴 시간 동안 무대 위에는 제국주의의 면면이 시뻘겋게 드러난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 천황을 찬양하며 죽음의 결의를 다지는 카미카제의 모습이, 온 일본 국민들이 연합군을 저주하며 자신들의 결의를 다지고 어린아이가 선언하는 모습이 가득 찬다. 그들은 붉은 조명 아래에서 끝없이 전쟁을 외친다. 윤동주가 일제에 의해 투옥된 뒤, 그와 다른 사람들이 생체실험을 당하고, 주사를 맞으며 괴로워 하는 모습을 우리는 생생히 지켜봐야만한다.


인정한다. 필요한 장면일 수 있다. 그 시대가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였고, 그 삶이 윤동주가 살았던 삶이었으니까. 그러나 윤동주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하는 윤동주다. 거대하고 암울한 시대 속에서 그런 섬세한 감성을 가진 채 자신을 참회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마침내 시대에, 저 달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윤동주다. 그의 괴로움이 내게 섬세히 다가오면 더 좋으련만 그 전부터 나는 이미 너무 괴롭다.




윤동주, 달을 쏘다 _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에게 우리들로 하여금 윤동주의 괴로움에 공감하고 우리의 것으로 화하게 하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피를 토하듯 읊는 ‘별 헤는 밤’과, ‘달을 쏘다’ 덕분일 거다. 바닥에 꿇어앉아 엎대어 울부짖듯 쏟아내는 시어들과 마침내 이 억압의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좀 더 단단한 갈대로 화살을 쏘는 윤동주의 처절한 외침은 가히 압권이다. <윤동주, 달을 쏘다>. 이 극의 제목과 무대 위에 쓰이던 윤동주의 시들이 다시금 와닿는 순간이다.





좀 더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서

무사의 마음으로 무사의 맘으로 달을 쏜다

통쾌하다 부서지는 저 달빛이

우습구나 쪼개지는 저 그림자

오늘도 내일도 나는 무사의 마음으로 너를 쏜다

시를 쓴다 삶이 쓰다 달을 쏘다


-달을 쏘다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묻는 친우들의 환영에 윤동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한다.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이 되기에 어려운 시대다. 그 누가 윤동주를 부끄럽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윤동주보고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우리는 어떨까, 굳이 그 시대에, 그 비극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너는 사람답게 살 수 있었겠느냐고 가정해 볼 필요까지도 없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우리는 부끄럽지 않게 살 자신이 있는가? 시대가 직면한 거대한 달의 그림자 아래에서 그 달을 향해 정면으로 화살을 마주 쏠 수 있을까? 우리는 커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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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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