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원작의 바람직한 각색, 넷플릭스 <빨간머리앤(Anne With an E)> [드라마]

글 입력 2019.03.0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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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초등학교 때 만들었던 비밀번호 찾기 질문인 ‘나의 보물 1호’의 답은 항상 ‘빨간머리앤 양장본’이었다. 몇 번 읽지는 않았지만, 책의 물성을 사랑하는 필자에게는 꽤 오랫동안 ‘보물 1호’ 였다. 초록 지붕 집의 앤, 에이번리의 앤, 레드먼드의 앤 3부작으로 구성되었던 빨간머리앤 양장본은 그렇게 책장을 지켰다. 그러다 얼마 전, 이사를 준비하며 읽지 않는 책을 중고매장에 팔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도 이제 방의 책장 대신, 서점 한쪽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넷플릭스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게 되었다. 드라마의 영문 원제는 <Anne With an E>로, 빨간 머리 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제목이었지만, 주근깨에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한 배우의 모습을 보고 빨간 머리 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약이 쉴새 없이 등장하는 청소년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넷플릭스에서 청소년기에 누구나 한 번쯤 접했을 문학을 실사로 옮긴다는 것이 흥미로워 보기 시작했던 것이 넷플릭스 추천 1순위 드라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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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읽어도 드라마를 감상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책에서 튀어나온 빨간머리앤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빨간머리앤>을 영상으로 구현해내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만큼의 규모를 가진 원작 소설은 아니지만, 글 속의 공간이나 캐릭터를 적절히 구현해내는 것은 어렵다. 당장 원작 만화나 소설이 존재했던 수많은 영상물이 실패한 사례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영화와 드라마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은 원작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보며 어릴 때 읽었던 소설 속의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우선 비현실적으로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애니메이션 속의 빨간머리앤과는 달리, 소설에 묘사되었던 것처럼 ‘말괄량이’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재현한 배우가 등장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파란 하늘은 아니지만 분명 따뜻한 느낌을 주는 에이번리 마을의 모습도 잘 표현하고 있고, 탁 트인 벌판에 있음에도 폐쇄적인 사고를 주입하고 있는 학교의 모습도 인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후에 이야기할 ‘원작과의 차별점’을 고려할 때, 원작의 설정이나 주요 사건들을 꼼꼼하게 잘 살리면서도 시의성 있는 주제들을 잘 엮어내고 있기 때문에, 감히 ‘원작만큼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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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과는 어떻게 다를까?



넷플릭스 드라마들은 ‘다양성’이 중요한 특징이다. 시대적 배경과 관계없이 최근 화두가 되는 페미니즘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인권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다양한 캐릭터를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에서도 원작에는 없었던 조세핀 할머니가 동성애자라는 설정이나, 길버트가 만나는 흑인 트리니다드 선원이 홀대를 받는 장면, 앤이 계속해서 그 시대에는 당연하다 여겨졌던 여성에 대한 프레임에 의문을 품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어린 소녀가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숭고한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다소 무리수라는 평가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시의성을 갖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소설 속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매슈와 마릴라가 싱글인 이유나 앤이 초록 지붕 집으로 오기 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도 추가된 부분이다. 결국 모든 예술, 특히 대중적인 예술을 표방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설득력’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스토리를 가진 모든 예술에서는 캐릭터가 특정한 욕망을 가지게 된 이유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가 작품성과 인기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그래야 대중들이 공감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러한 부분들이 추가된 것이 ‘신의 한 수’라고 느껴진다.

또한 시즌 2부터 시작되는 금광 관련 에피소드는 시대적 배경을 잘 반영하면서도 캐릭터들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시내로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타야 하는 시골인 에이번리 마을의 폐쇄적 특성 또한 반영하고 있는 인상적인 사건이다. 전지적 시점에서 사건의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시청자들이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포인트도 충분히 잘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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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어 다시 본 앤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앤은 고아원을 전전하다가 매슈와 마릴라 커스버트 남매에게 입양된다. 원래는 일꾼으로 일할 남자아이를 원했던 커스버트 남매는 당황스러워하지만, 결국 다른 일꾼을 쓰기로 하고 앤을 딸로 받아들인다. 무뚝뚝한 매슈와 엄격하고 냉정한 마릴라의 집은 앤이 들어온 이후로 생기가 넘치게 된다. 소설의 발단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는데, 영상으로 앤의 존재감을 확인하면 훨씬 인상적이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 속의 앤에게 적응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소설 속 앤의 수다스러움은 다소 문학적으로 느껴지지만, 드라마를 보며 앤의 흥분되는 감정보다는 마릴라의 예민함에 더 공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드라마가 성인의 시선에 더 가깝기 때문에, 앤은 사고뭉치에, 허무맹랑한 이야기 속에 빠져 사는 골칫거리 어린아이로 보일 수밖에 없다. 소설을 읽으면서는 ‘이렇게 착한 앤을 알아주지 못하다니’ 하는 억울함을 느꼈다면, ‘저렇게 키우기 힘든 아이를 받아준 커스버트 남매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커스버트 남매는 앤을 완전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게 된다. 가족뿐만 아니라 앤의 또래 아이들, 에이번리 마을 전체가 앤을 꼭 필요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소설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영상으로 옮긴 시즌 1은 이렇게 사람들이 앤을 이해해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단지 사회적 신호를 파악하는 것이 서툴 뿐, 섬세하고 어른스러운 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 사람들은 비로소 앤으로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시청자들도 그렇게 이 드라마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위로하는 드라마, 빨간머리앤


막상 그 3부작 <빨간 머리 앤> 양장본을 많이 읽었는가 떠올려보면,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도 기억 속에 인상적으로 남아있던 이유는, 돌이켜보면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책을 좋아하고, 할 줄 아는 것도 많고, 섬세한 나를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속상했던 유년기에, 앤이 차츰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았다. 그런 마음으로, 다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며 위로를 받는다.

책은 읽지 않지만, 드라마를 통해 영원한 보물 1호로 남아있게 된 빨간머리앤. 이 드라마의 이미지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만화주제가로 이 글을 마무리해보려 한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간머리앤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가슴에 솟아나는 아름다운 꿈
하늘엔 뭉게구름 퍼져나가네


[김채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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