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과 언어, 그리고 영화<FILO>[도서]

글 입력 2019.02.25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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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뭐예요?" 라는 질문에 "영화"라는 답변을 가장 많이 해본 것 같다. 나는 소위 말하는 문화생활을 즐겨 하고자 노력하는 편인데 공연, 전시, 도서 등보다도 유독 영화를 자주 찾는다. 공연이나 전시에 비해 쉽게 접할 수 있고, 책 읽는 속도가 유독 느린 나에게 영화는 누구에게나 2시간 남짓이라는 공평한 조건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대학생활을 할 때는 서울에서 영화 토론 모임을 했었다.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직접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다양한 생각이 오갈 수 있음이 즐거웠다. 서울에서 했던 모임의 경우 각자 영화를 본 후 A4 한 페이지가량의 감상문을 써야 했다. 영화관을 나서며 항상 "좋았다" 혹은 "별로다"의 감상이 전부였던 나에게 좀 더 영화를 깊게 되뇌어 볼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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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 자주 찾고 영화 팟캐스트를 즐겨 들으며 영화를 좋아한다고 자부하던 나였지만, 영화를 다룬 책이나 잡지를 읽은 적은 거의 없었다. 로버트 맥키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를 읽다가 관둔 것이 그나마 유일했다. 선물로 받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은 몇 장 보지도 못한 채 책장에 고이 모셔놨다. 이런데도 감히 영화를 좋아한다고 떳떳이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들었다.

그런 나에게 다시 한 번 영화를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FILO>라는 이름의 영화 매거진이다. 영화와 언어와 사랑의 탐색지를 표방하는 <FILO>는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것보다 더욱 깊숙한 영화의 면모를 보여준다. 국내외 영화평론가를 비롯하여 배우나 감독 등 초대 필진이 함께 참여해 단순한 감상을 넘어 통찰이 담긴 비평을 다룬다.

<FILO> 6호(2019. 1,2월)는 다양한 필진이 꼽은 2018년 베스트 영화를 소개한다. 인생 영화 혹은 올해의 영화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눠 본 적이 적지 않은 편이었지만 이들의 방식은 좀 더 심도 있고 다채로웠다.

남다은 평론가의 글은 마치 영화를 현미경으로 샅샅이 살피는 듯했고,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글은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여 쉽게 와닿았다. 평론가 에어드리언 마틴은 선정한 작품을 통해 한 해의 성격을 크게 아울렀고, 이후경 평론가는 '말'이라는 동물을 통해 서로 다른 영화를 풀어냈다. 클레어 드니 감독과 태그 갤러거 평론가의 글은 짧았지만 그 이상으로 진심과 위트가 돋보였다.

덩달아 나의 2018년 베스트 목록을 꼽아보았다. <FILO>의 '공개 날짜와 상관없이 2018년에 본 영화' 기준과는 조금 다르게 '2018년, 영화관에서 본 영화'로 선정했다. <리틀 포레스트>로 평온한 시간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 <코코>와 <어느 가족>는 홀로 지내는 나에게 가족이라는 유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완벽한 타인>에서는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큰 웃음을 만들어내는 정교한 설계를 느꼈고 <버닝>에서 흔들리는 종수의 눈동자에서 나의 20대를 마주했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로 내가 즐겨온 것에 대한 향수를 만끽했고, <보헤미안 랩소디>는 한 달 여간 나의 머릿속을 퀸의 노래로 가득 메웠다. 재개봉한 <라라랜드>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두 아름다운 영화를 만나며 어딘가에 조금이나마 더 가까워지고자 간절한 바람을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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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동안 책이나 잡지를 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보지 않은 영화를 다룬 비평이나 감상을 미리 보기가 꺼리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의 영화 소개 방송이나, 관련 유튜브를 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처음 사귀는 사람을 내가 알아가기도 전에 주변의 경험과 의견만을 듣고 함부로 그를 예단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FILO>를 처음 펼쳤을 때도 같은 걱정을 했다. <FILO> 6호에서 다룬 영화들은 열에 아홉은 보지 못했거니와 대부분이 처음 들어보는 작품들이었다. 그렇기에 가능한 한걸음 더 물러선 채 담담히 그들의 비평을 읽으려 노력했다.

최대한 담백하게 글을 받아들이려던 중에도 유독 눈에 띄는 작품들이 몇 있었다. <사령혼>, <다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 <가끔 구름>, <베스턴>, <풀잎들> 등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FILO> 6호를 보지 못했다면 이 영화들을 평생 못 만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영화들은 내가 보지 않은 것들이 아닌, 아직 만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FILO>를 통해 만난 영화들이 2019년 나의 베스트 목록 안에 포함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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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마다 나오는 베스트 목록이란 근본적으로 독단적이고 환원적인 것이다. 그런 목록들이 합세해 관습적 지식을 강화하고 스스로 문화산업을 위한 도구로 행세한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런 의구심을 공유함에도 습관 때문인지 허영 때문인지 우리는 계속해 목록을 발행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현재를 규정하는 난장판에 기여하기보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 목록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목록을 작성하는 일은 숙고의 기회가 될 수도 있으며, 우리 자신의 목록, 어떤 것들이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우리 최선의 추측을 가까이 들여다봄으로써 오늘날 영화문화가 당면한 진짜 문제는 무엇인지 스스로 상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p.24  / Dennis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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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동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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