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그저 그림] 프롤로그

글 입력 2019.02.1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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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최초의 생각

 

인정해야겠다. 그림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림을 그려서는, 도무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소모되는 건 종이, 연필, 물감 그리고 시간과 체력.

 

운이 좋아 그림으로 돈을 벌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 그림이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눈길을 끌기 위해 어디에 가만히 걸려 있거나, 무엇의 표면을 감싸고 있거나, 때론 그마저도 못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뿐인걸. 단지 그 모습을 원한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한 것이지, 그림이 하는 일은 여전히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002. 의심의 믿음

 

아니 다시. 인정하고 싶지 않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갈되는 것처럼, 그림도 어딘가에는 사용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어떤 형태로든.

 

사실보다 진실이 중요한가. 그림이 무엇인가는 한다고 믿는 믿음은, 실제로 그림이 어떤 현실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보다는 중요한가. 어째서. 그러거나 말거나 ‘더 중요한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마음에 기쁨, 행복 아무튼 풍성한 무엇은 던져준다는 명분은 단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허언은 아닌지.

 

누군가 그런 말을 한다, 아니 사실 아주 많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며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한다고, 세상의 어떤 것들과는 다른 목적을 가진 게 그림이라고.

 

그래. 고백하건대 나 또한 그런 강한 믿음을 지금까지 밀어붙인 사람 중 하나다. 병을 고치는 것만큼 그림도 중요하다고, 삶에 꼭 필요하다고. 그런 믿음으로 질척대며 여기에 이르렀기에, 새삼 질문을 던져보고 있다. 나는 그 믿음에 배신당했는지.

 

아니라면, 평생 무엇에 의해서도 그 믿음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나, 그렇게 살아갈 수 있나, 얼마나, 언제까지. 얼마나, 언제까지…….

 

 

#003. 안녕하세요

 

얼마 전 ‘글쓰기는 나에게 한 번도 감옥이 아니었다’는 책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그 리뷰를 쓰며 알았어요, 반대로 그림 그리기는 감옥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꽉 쥐고 있었구나, 매달리고 있었구나, 했습니다.

 


사변은 창작 충동을 압살하여 예술가를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약과 같다. 회화가 시각적 감수성을 버리고 사변으로 달아나버리면, 사변이 시작되는 그 자리에서 회화는 끝난다. 화가가 흥미로워하는 것들에 심미적 관심을 기울일 때 의미는 생성된다. 너는 예술론을 쓰기보다 너만의 구체적인 경험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

 

-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中



가오싱젠의 충고를 처음 발견했을 때가 3년 전이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그때도 그림은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로부터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햇수로는 8년이란 시간이 걸렸네요.

 

뭘 그렇게 망설이거나, 오해했던 걸까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그림을 말로 바꾸려 했던 습관이, 그 과정을 즐겼던 마음이 외려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일조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림을 설명하는 게 좋아 도슨트를 했었고, 비평가의 글을 좋아했고, 때론 그들의 위치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지점에서 그림을 말과 글자로 설명하는 데 한계와 싫증 이상의 경멸 비슷한 염증을 느꼈습니다. 희한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 적도 있었으면서, 어느 순간 그림을 앞에 두고 청산유수로 말하는 사람의 말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이상했습니다. 말이 그림을, 그림에 관한 순수한 욕구를 가둬버릴 수 있다는 위험을 은연중에 깨달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는 언어와 관념을 잊어라. … 그림이 만족스럽다고 해서 만족스러운 제목이 저절로 찾아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언어의 한계다.”


-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中

 


그림은 그림으로만 고요하구나, 싶었습니다.

 

지난날들보단 마음이 훨씬 편합니다. 이제는 ‘엄청난 걸 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턴 많이 벗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의 실체가 ‘엄청난 걸 해야 한다’는 정도인지도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런 압박으로 인한 두려움이 그림이 아닌 다른 곳으로 자신을 밀어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마음에 한 줄기 빛이 깃드는 무엇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좋겠어요. 그게 다입니다. 이것도 훗날 생각했을 때 엄청난 욕심으로 비친다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차라리 지금이 낫습니다. 예전보다 더 나아진 것 같아요.

 

이제는 그림을 그려야죠. 이런 생각을 한 지 정말 얼마 안 됐습니다. 결국은 이것뿐이었다는 이유라 다른 선택지도 없네요. 애정보단 애증에 가까우며 소망보단 미련에 가깝습니다. 결의보단 시도입니다.

 

 

#004. 그런 그저 그림

 

처음에 생각했던 섹션 명은 [그저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은 그림일 뿐이라는,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그림을 온전히 그림으로만 바라보는 시도를 하고 싶었어요. 자꾸 그림에 의미를 주던 행위가 결국 그림을 저에게서 멀어지게 만든 것 같아서 반대의 실천으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그림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기 위해서요.

 


“떠오른 생각이 있어 메모를 해두었다 해도, 일단 그림을 그리려고 붓을 잡았다면 메모는 저만치 밀어두는 것이 좋다. 너는 다만 오랫동안 음악에만 잠겨 있으면 된다.”


-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中

 


그림에 앞서는 문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저 그림'은 어감이 서정적이기만 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앞에 ‘그런’을 붙이니, 그림을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잘 모르겠습니다, 느낌은 주관적일 뿐이라. 아무튼 그렇게 ‘그런 그저 그림’이 만들어졌습니다. 잘못 읽으시면 안 돼요 ‘그저 그런 그림’이 아닙니다. 그림이 그저 그렇다는, 무미건조하단 뜻은 절대 아니에요. 머뭇거리셔도 안 돼요. 그러다간 ‘그그…그’ 하면서 더듬거릴 수도 있습니다.

 

 

#005. 이제

 

그저 그림일 뿐인 그림과 상생하는 자의 이야기가 담길 예정입니다. 명확한 계획이나 기획이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사진이나 그림이 등장할 수도, 책의 한 구절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원칙과 방식, 목표는 있습니다.


원칙은 가오싱젠의 말처럼 ‘구체적인 너만의 경험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방식은 그림에 중심을 두는 것입니다. 논리를 지양하고 말을 참으려 합니다. 그래도 이야기는 저절로 생길 것 같아요.

목표는 다작입니다. 많이 그리겠습니다. 그렇게 그저 존재하는 그림을 만나기 위해서.

 

세 가지 기준은 단순하게 결정되었습니다. 예전의 모습 뒤집기랄까요. 구체적인 경험을 생각하기보다 하나의 명징한 예술론을 쓰고 싶었고, 감상보다 말이 먼저였으며, 그림을 많이 그리지 않았거든요. 이 모든 행위를 반대로 해보는 게 [그런 그저 그림]이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뭘 하겠느냐고 물어도 뭘 할 게 없어, 그림쟁이한테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도 그림쟁이가 되지 못해. 그렇지 않겠어? 미대 나와 봐야 밥조차 먹지 못하니까. … 게다가 난 미술 선생 같은 건 되고 싶질 않다구. 원숭이같이 떠들기만 하고 버릇없는 중학생들에게 그림이나 가르치며 일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아.”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中 이토의 말


 

다소 오만하거나 건방져 보이는 말인가요?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한 게 제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림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제일 큽니다. 그러니까 싫은 건 일단 싫다고 이토처럼 확 말해버리고, 그 다음에 보이는 것을 찾아가는 게 우선인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필요할 사과는 나중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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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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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하는스누피
    • 잘 읽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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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artable
    • 2019.02.28 21: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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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하는스누피스누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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