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보이첵, 보이첵, 보이첵! [공연]

글 입력 2019.02.13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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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첵 포스터.jpg


연극, 보이첵을 봤다.




1.


우선 프리뷰를 쓸 때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이 연극이 무언극이라고 소개한 점이다. 신체를 중요하게 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연극이 무언극은 아니었다. 관객에게 보이첵을 전달하기 위해, 연극 < 보이첵 >은 언어와 몸과 오브제를 충실하게 사용한다. 지나칠 정도로 그랬다.


일단, 장면 장면은 신기했고 대단했다. 아무것도 없는 무대에서 의자라는 소품 하나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11명의 배우들은 의자를 합체하기도 분해하기도 했다가 뿔뿔이 흩어졌다가도 순식간에 한몸이 되어 뭉치기도 했다. 감탄의 연속이었다. 프리뷰에서 오브제의 사용이 사물의 원 의도와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관객들을 빨아들인다고 말했는데, 이번 연극의 무대에서 의자라는 사물의 원관념은 거의 조각 조각 분해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의자의 다리, 몸, 등받이를 이루는 나무쪼가리들은 의자로, 감옥으로, 침대로, 술잔이나 권력의 상징으로, 때로는 감정이나 몸 그 자체로, 해체된 뒤 새롭게 조립된다.


의자만으로 무대를 채우기 때문에 연극은 조명과 그림자를 충실하게 사용한다. 인물들의 감정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과 그 아래서 민첩하게 움직이는 배우들, 앉거나 서거나 쪼개는 것을 넘어 배우의 신체 일부가 된 듯한 의자의 사용은 70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관객을 무대로 빨아들였다.


 

보이첵 의자.jpg
 


그러나, 혹은 그래서 아쉬웠던 점은, 연극이 무대 위에서 지나치게 말이 많았다는 점이다. 연극은 평범한 바깥 세계의 사람들을 무대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관객들은 무대 위 배우들과 함께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안으로 자기를 끌어들인 무언가, 의미의 의미라도 찾기 위해 관객들은 고군분투한다. 각자가 가진 삶의 무늬를 투영해가면서. 예술작품의 의미는 그렇게 발생한다.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는 예술작품은 그렇게 친절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적당히 감추고 있어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 너무 많은 작품들은 감상하는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연극 < 보이첵 >은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분명 장면 장면의 흡인력은 뛰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뻔해져버린 200년 전의 시놉시스 위에 너무나 많은 언어를 끼얹어 버리는 바람에, 의미를 찾아 무대 곳곳을 뒤지기보다 가만히 누워 떠먹여주는 보이첵 한 숟가락을 받아먹게 되는 것이다.



 

2.



또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내가 보이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확실히 그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가 없는 보이첵, 사방 팔방 뛰어다니며 시중을 들고 조롱당하는 보이첵, 억압당하는 보이첵, 완두콩만 먹고, 불편하게 누워 오줌조차 마음대로 누지 못하는 보이첵, 보이첵, 보이첵. 그러나 그렇게 많은 언어를 사용하고도 왜 인간 보이첵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던 걸까? 연극이 전달하고자 했던 보이첵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연극은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두 인물을 그린다. 보이첵과 마리. 두 인물은 어디에도 진실로 소속될 수 없는 이방인같은 존재다. 시놉시스에 따르면 마리는 가난 때문에 악대장에게 몸을 팔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보이첵은 이 사실을 알고 마리를 죽이고 만다. 뷔히너의 원작은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되었는데, 실제 사건에서 정신 착란을 주장하던 보이첵은 사건 당시 제정신이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공개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 사건을 통해, 경제적 피폐함이 낳은 도덕성 부재의 인간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다고 한다. 보이첵이 정신질환자가 아니라면, 그는 도덕성이 부재한 인간이거나 최소한 마리에 대한 도덕성은 없는 인간이다. 그를 정신질환자로 그린다면, 그의 살인은 우발적인 것-멀쩡한 정신을 통해 이루어진 계획은 아닌-이고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관객이 얻을 메세지는 전무하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첫 장면부터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보이첵을 보여준다. 살인하기 직전에도 그는 환청을 듣고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다. 그러나 그 밖의 장면 속에서 보이첵은 제정신이다. 오히려 그를 둘러싼 어느 누구보다도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를 조롱하고 억압하는, 동물처럼 그려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첵은 누구보다도 인간이다. 도대체 그래서 그는 어떤 인물인가? 그의 살인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좌절한 이방인인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낸 정신병자인가?

 

연극은 장면과 장면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막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각 장면이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각 장면 속의 소외당한 인간 보이첵들이 따로 따로 존재하며 연결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연극이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개인의 파멸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그래서 200년이 지나 이제는 조금 불편해질 결말부까지 최소한의 설득력을 가지려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보이첵이 켜켜이 쌓여야 했을텐데, 단면으로만 존재하는 여러 장의 보이첵은 아쉽게도 그렇게 와닿지 못했다.


 

보이체엑.jpg
 


덧붙여, 마리의 사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안하고 있던 부분이었지만, 연극을 보고 나니 더욱 정리되지 않는 기분이다. 마리는 악대장의 유혹에 넘어가 한 점 고민 없이 부정을 저지른다. 서로에게 이끌려 첫 잠자리를 가지는 둘을 두고 코러스 중 하나는 '짐승의 탈을 쓴 인간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부정은 가난에 의해 억지로 떠밀린 결과로 그려진다. 그는 웃고 있지만 우는 얼굴로 인간은 모두 지옥에 간다며 소리치고, 돌아오지 않는 보이첵을 원망한다. 그리고 연결되지 않는 각 장의 마리들을 설명하기도 전에, 마리는 죽어버린다. 징벌받듯이. 도대체 마리를 가지고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보이첵은?

 

연극을 관람하는 내내, 보이첵을 보며 < 이방인 >의 뫼르소가 떠올랐다. 삶으로부터 소외당한 인간 뫼르소가 영원한 추방을 통해 진정으로 삶에 편입하게 되는 아이러니. 공동체로부터 고립된, 마찬가지로 이방인인 보이첵이 마리를 살인한 것은 차라리 그를 통해 소외로부터의 해방을 이루려는 시도이지 않을까. 땅에 붙어있는 권리로부터 속박은 시작된다. 권리가 많을수록 계급은 올라간다. 권리가 적을수록 의자의 아래로 깔리게 된다. 그러나, 권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땅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될지도 모른다. 배변 욕구마저도 통제당하는 가장 하위계급의 인간이 가장 마지막의, 하나뿐인 권리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해방을 염원했을지도. 그렇다면 마리의 시신 위에 오른 그가 저 너머로부터 보게 된 것은 인간이 영원히 욕망할, 자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라리 마리를 아예 보이첵의 소유물 쯤으로 다뤘더라면 마지막 권리마저 박탈당한 인간 보이첵만큼은 더 잘 보이지 않았을까?


어찌 되었건, 장면 장면을 나타내는 신체 언어는 관객 모두를 홀린듯이 끌어당겼음에도 동행인과 나는 남은 것은 그것 뿐이라는 어쩐지 애매한 감정이 깔린 채로 돌아오게 됐다.



 

3.



보이이이이첵.jpg
 


그럼에도, 연극 자체는 꽤 인상적이었다. 사다리 움직임 연구소가 내세우고 있는 신체 언어는 말 할 것도 없고, 특히 음악의 사용이 탁월하다고 느꼈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도 꽤 자주 들어본 아스토르 피아졸라! 파멸을 향해 치달아가는 인물들이 (안타깝지만)자세하게 느껴지진 않았어도, 그 비극적인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음악이 정말 큰 역할을 한 듯 하다. 뻔하디 뻔한 텍스트가 지루하게 느껴질 틈을 거의 주지 않고, 조명과 음악과 배우, 의자가 무대에서 하나의 그림이 된다. 기대와는 달라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기대한 정도의 만족스러움은 채울 수 있었던 무대였다.



[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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