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린 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 [도서]

틀린 번역은 없다. 더 나은 번역이 있을 뿐.
글 입력 2019.02.05 21:5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어떤 위대한 번역가라 해도 작가가 쓴 문장보다 좋은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어떤 위대한 학자라 해도 작가가 쓴 문장보다 나은 의미를 담은 문장을 창작해 낼 수 없습니다. 번역은 그야말로 작가가 쓴 의미를 찾아가는 고된 노동인 것입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여러 출판사의, 여러 '어린 왕자'를 읽어보았지만, 그 책들을 보며 번역의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내가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원서와 번역본을 비교할 수가 없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읽어본 '어린 왕자'의 모든 번역본의 내용이 거의 같았기에 오역의 여지를 의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KakaoTalk_20190205_203405664.jpg
 

하나의 단어를 두고도 누가 번역을 했냐에 따라서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책 '<어린 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는  어린왕자의 원서와 저자 이정서의 번역본을 1:1로 대응시켜 보여줌으로써 여지껏 읽어왔던 어린 왕자 번역본의 오역을 바로잡고,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살려 직역하고자 한다. 실제로 작가가 원래 썼던 대명사 하나, 접속사 하나, 심지어 쉼표 하나까지도 임의로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면서 생텍쥐 페리가 썼던 원서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린 왕자의 존칭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인 ‘나’에게 단 한 번도 아저씨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어른의 시선에서, 어린 왕자라면 비행기 조종사를 ‘아저씨’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번역가의 주관이 개입된 명백한 오역이었다. 오히려 어린 왕자는 처음에 ‘나’를 만났을 때 ‘저기… 양 한 마리만 그려 주실 수 있나요?’라며 존칭을 사용했다. 기존의 번역서에서는 항상 ‘저기.. 양 한 마리만 그려줄래?’라고 나타나 있던, 바로 그 문장 말이다.


어린 왕자를 처음에는 이렇듯 존칭을 사용하다가, 대화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낮춘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나'가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어른이기에,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어린 왕자가 점차 대화를 편하게 하게 됨을 의미한다. 아마 기존의 번역본들은 존칭과 반말이 섞여 있는 것에 통일성을 주고자 처음부터 어린 왕자가 반말을 하는 인물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걸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어릴 적의 내가 반말과 존칭이 섞여 있는 문장과 마주했다면 온전히 이해하지 못 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그러한 번역으로 인해 어린 왕자가 '나'에 대한 적대심을 풀어가는 과정을, '나'가 어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임을, 둘 사이의 공감대가 커지고 있음을 느끼지 못 하고 그냥 지나쳐 왔다는 사실은 분명 아쉬운 점이다.




좋은 아침, Bonjour !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Bonjour(봉쥬르)에 관한 내용이었다. 우리가 기존에 읽었던 책들은 어린왕자가 여행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에게 건넨 '봉쥬르'라는 인사를 원래 뜻인 '좋은 아침'이 아닌 '안녕하세요'로 번역한다. 우리나라의 정서상, 통상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대뜸 "좋은 아침~"이라고 외치는 것보다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등의 인사를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Bonjour는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유일한 문장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어린 왕자에는 ‘밤이 왔다.’, ‘해가 지고’ 등 소설에 흔히 사용되는 시간적 표현이 전혀 들어있지 않음은 물론 ‘새벽’, ‘아침’ 등 시간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단어 또한 나타나 있지 않다.

이 때문에 Bonjour는 단순히 인사의 개념을 넘어서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을 떠나서 여행을 하는 동안의 시간적인 변화를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좋은 아침’이 ‘안녕하세요’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만한' 장미?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어린 왕자 속 ‘장미’의 이미지였다. 그간 나는 어린 왕자의 장미를 까칠하고, 오만한 꽃으로 생각해 왔다. 자신의 고집대로 해야만 하는 ‘오만한’ 꽃.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껴 왔을 것이다. 그간의 번역서들이 장미를 그렇게 표현해 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우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도한 꽃이었다. (이정서 역)

꽃은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도 오만한 꽃이었다. (기존 번역서)


꽃은 제가 우는 모습을 어린 왕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나도 자존심 강한 꽃이니까. (기존 번역서)


‘아’ 다르고 ‘어’ 다른게 말이다. 비슷한 뉘앙스의 번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래의 두 번역은 꽃에게 오만하고, 자존심 강하다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음이 명백하다. 실제로 해당 단어를 프랑스어 사전에서  찾아봐도 가장 먼저 나오는 뜻이 바로 ‘오만하다.’이기 때문에 이 번역을 틀렸다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생텍쥐 페리는 정말 오만한 꽃을 생각하고 이러한 문장을 쓴 것일 까? 어린 왕자 속 장미는 어린 아이와 참 많이도 닮아 있다. 자신의 고집대로 행동해야 하고,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쏟아 주길 바라며,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아이 말이다. 우리가 그런 아이를 보며 오만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어린 왕자가 왜 자신의 별을 떠났는지, 그리고 왜 자신의 꽃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별로 돌아가려고 하는지 이유가 분명해진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서 혼자 잔잔한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처럼, 자신이 없으면 자신의 꽃 또한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렇게 자신의 소중한 장미의 행복을 위해서 떠났지만, 여행을 하면서 장미의 모든 행동들이 어린 아이의 투정과 비슷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꽃의 연약함을 알게 된 것이다.


"번역이 잘못되면 사실은 원래의 교훈이나 감동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그 흔적만 남게 되는 것일 뿐."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단호하게 말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이정서 번역가에 대한 걱정이 점점 생기기 시작했다. 그만큼 기존 번역서들의 오역을 가감없이, 날카롭게 꼬집고 있는 이 책은 기존 번역자들에게는 분명 반갑지 않은 책일 것이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같은 책일지라도 더 정확한 번역을 통해 원작의 의미를 충실히 하고자 하는 이러한 노력이 매우 반갑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이런 날카로운 지적을 통해서,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통해서 내가 이미 완벽히 안다고 생각했던 명작들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번역한 <이방인> 또한 읽어볼 계획이다. 그간 나는 <이방인>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잘못 알고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유다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