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유독 돈에 대한 욕심이 없다. 어쩌면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게 된 것은 축복일지도 모른다. 욕망은 결핍에서 발생하기에, 이러한 사실은 내가 지금까지 돈이 부족해서 무언가를 못한 경험이 별로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오늘은 얼마짜리의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지 매일 고민하는 삶을 아마 나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며 돈이 없으면 차라리 굶고 말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매일 굶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이 좋다.
그렇지만 내가 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유독 꺼리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이다.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쭉 살아온 나는 유독 우리 아파트 단지가 좋았다. 근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우리 아파트에는 나무가 많았다. 봄에는 철쭉이 가득 피었고 여름이 되면 나무가 푸르러서 가위로 잘라주지 않아도 보기 좋았다. 그런 나무 위에는 까치집이 종종 보였고 우리는 가을이 되면 그들을 위해 까치 밥을 남겨 주었다. 곳곳에 놓인 수석은 징검다리 같아서 우리는 그 위를 뛰어 놀았고 겨울이 되면 사이 사이에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그런 우리 아파트 단지를 누비며 자랐다. 그런데 어른들은 우리 동네를 가난한 동네라 불렀다. 과거엔 달동네였다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우리 아파트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속삭였다. 그건 아파트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어른이 될수록 우리 동네에 대해 자조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렇게 내가 우리 아파트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구질구질 해져갔다.
살면서 가난을 느끼지 않았음에도 나는 나를 가난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것은 모순적이게도 돈에 구애 받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번졌다. 누군가가 내게 그것은 돈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하는 게 싫었다. 돈보다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가난하다고 말하던 동네가 나에겐 너무 좋은 곳이어서 내 머릿속 돈에 대한 개념이 모호해졌다. 돈보다 소중한 것이 과연 무엇이며 무엇이 그 가치를 결정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기에 나는 그냥 그런 얘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었다.


돈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내가 잘못이라면 돈을 좇다가 망한 이들은 잘못이 아닌 걸까? 개인의 욕망은 다양한 형태로 발생하고 돈과 집은 그것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은 가치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 욕망은 실현될 수도,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욕망은 이뤄지지 않을수록 거대해지기에 바라는 것이 간절할수록 실현 불가능할 확률이 크다. 잘못한 것은 개인이 아니다. 상황이 개인을 만드는 것이다. 마민지 감독이 영화 말미에서 비로소 가족을 이해하게 된 이유는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현재의 ‘마 가족’을 만든 것은 8,90년대의 대한민국일 뿐, 온전한 그들의 몫은 아니다. 그것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던 구원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