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환경으로 존재하는 사람'의 사람 [영화]

글 입력 2019.01.2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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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추천

이제는 누구와도 같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을 한 번이라도 느낀 모든 사람들에게.




환경으로 존재하는 사람


   

기억 하나.

 


좋은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옆에 어느 부녀가 앉았다. 아이가 탄 휠체어나 움직임으로 그 아이가 지체 장애인이라는 사실은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언뜻 고개를 돌려 본 광경에 숨이 막혔다.

 

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

 

평생 내가 가지지 못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 도달할 수 없는 마음, 영혼 따위의 단어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햇빛이 너무 밝은 날이었다. 때맞춰 도착한 장애인 복지회관 버스에 아이를 태워 보낸 아버지는 떠났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거기 앉아 울었다.

 

연민과 두려움이었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지만, 지금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인. 솔직하지만 잔인한 실제의 감정. 힘들겠다, 정말 힘들겠다. 그런데도 그렇게 웃을 수 있다니,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니,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로 힘들었겠지, 지금도 힘들겠지 앞으로도. 그렇게 마무리하고 마는.

 

 

혜영의 눈빛은 내게 지난날 경험했던 ‘도달할 수 없는 눈빛’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도달할 수 없는 마음, 사랑, 희생, 헌신… 혹은 이런 단어로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설명할 수 없어 말할 필요가 없는 그것.


상을 받은 혜영은 ‘이 상의 주인공은 혜정’이라며, 자신은 혜정이 살아가기 위한 ‘환경으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환경에 요구되는 건 기능이다. 누군가의 환경으로 살기 위한 사람은 그때만큼은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 환경에서 누군가가 살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혜영의 시간은 ‘두 개의 시간’으로 분리된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아기는 일상을 살면 할머니가 된다. 요점은 '무사히'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상은 칼날을 감춘 판도라의 상자이기도, 행복을 가득 담은 선물상자의 포장지이기도 하다. 후자이기만 하면 문제가 없는데, 바로 전자 때문에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라는 가사를 부르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런 얄궂은 일상을 겪는 것과, 아예 살 수 없다는 건 아주 큰 차이다. 그래서도 혜정에게 일상을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다는 사실은 그토록 혜영을 아프게 만들었을 것이다. 혜정은 기꺼이 그의 환경이 되어 준 혜영과 함께 비로소 일상을 산다. 그 일상은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바다를 걷는 행복이기도, 기타를 배울 때처럼 ‘이걸 끝까지 해야 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앞에 있는 상황에서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하고 자명하다. 장애인은 ‘환경으로 존재하는 사람’ 없이, 일상을 누릴 수 없다.




‘환경으로 존재하는 사람’의 사람



기억 둘.



스물 셋. 여느 날처럼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어둑한 길을 걷고 있었다. 움직이는 바닥과 발끝을 보며 걸었다. 한 발이 앞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다른 한쪽 발이 나오며 나는 점점 앞으로 가고 있었다. 규칙적인 보도블록은 조금씩 모양이 바뀌었지만, 결국은 패턴이었다. 그런 아무것도 아닌 움직임은 그렇게 계속될 것 같았다. 보다가, 잠시 멈춰 섰다.

 

무심코.

 

이 두 발로 서기까지, 스스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인정할 수 있었다. 여기 우뚝 선 나는,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심하게 말해 부모님의 소중한 무엇을 빨아먹고 산 기생충 같기도, 조금 순화해 표현하면 누군가 내가 모르는 소중한 걸 담아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기도 했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내가 아니었다. 진실로 나는 내가 되기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발끝으로 선 감각이 잠시 사라지는 것 같았다.


    

혜영은 처음에 혜정이 떠나면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혜정이 시설로 가게 되자 그의 자리가 마음속에 동그랗게 남아있었다 고백한다.


그건 어떤 동그라미였을까. ‘혜정으로밖에 채울 수 없는’ 구멍이라고 정의해 보았다. 혜정이 아니면 누구로도 채워질 수 없는 공간. 그저 그렇게 텅 비어있어야 하는 마음 속 공간. 그래서 혜영은 혜정을 데려오기로, 같이 살기로 결심한다…

 

여기서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혜영은 혜정을 어떤 면에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텅 빈 공간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했을 테니까. 인간의 마음이 한 가지 이유로만 움직이는 단순한 건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혜영은 그 동그라미를 방관하는 것보단, 채우고 나서 그 다음의 문제를 직면하는 쪽이 더 ‘나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다고.

 

혜영의 선택이 갖는 가치가 무색하다 말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그에게 혜정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서 메마른 논리를 세워 보았다. 비장애인 입장에서 장애인을 빌려 말해지기 쉬운 무엇의 순서를 바꿔보고 싶었다. 자발적으로 보이는 혜영의 선택은 사실 필연적이었을 수 있다고. 혜영의 강력한 동기는 양심적인 선의가 아닌, 혜정이라는 존재 자체였다는 사실을 강조해보고 싶다. 혜정이 때문에, 혹은 덕분에 혜영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선택할 권리조차 없이 살아진 혜정의 삶, 그 결과가 남긴 상흔은 혜영의 어떤 선택을 불러냈다는 건 역설적이다.

 

혜영은 자신의 선택을 이끌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며 ‘나의 삶 역시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곧 다음과 같은 진실의 변주다. 인생에서 어떤 사람의 존재는 어느 한 쪽의 누군가에게 ‘더’ 필요한 게 아니라, 우린 서로 아주 똑같은 정도로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 존재의 성질, 능력과 관련 없이 존재 자체로 말이다. ‘환경으로 존재하는 사람’ 이전에, 그의 사람이 있었다.


+


영화와 조금 벗어난 감상이지만, 아무튼 이 영화를 볼 때 든 생각이니 여기 적는다.


이야기 속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찌됐든 이들의 이야기는 한 차례 지나간 시간을 담아내 편집된 순간을 재생한 영화의 형태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실제보다 감당할 수 있는 형태다, 실제 삶보다는 낫다. 그래서 삶은, 계속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느낀 걸까. 혜정과 혜영의 시간이 언젠가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나에게도 그러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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