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차 대전 속 아더 왕과 맥베스, 그리고 아가멤논 [공연예술]

자, 공연을 시작한다.
글 입력 2019.01.0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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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왕 전설과 아가멤논 신화,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까지. 줄거리를 자세하게 알지는 못해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들이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이 세 이야기를 세계 1차 대전, 영국군과 독일군의 참호를 배경으로 재해석해 관객들 앞에 선보인다.



모르가나: 아더 왕 전설 속 마녀 모건 르 페이


트릴로지 시리즈답게 ‘벙커 트릴로지’ 또한 세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중 ‘모르가나’는 아더 왕 전설 속에 등장하는 마녀 모건 르 페이와 아더 왕을 비롯한 원탁의 기사들을 모티브로 삼은 에피소드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모건 르 페이는 아더 왕과 아버지가 다른 남매 사이로, 아발론의 여왕이자 고르국의 왕비이다. 모건은 상처를 치료하는 마법, 가짜를 보여주는 마법 등을 사용해 사람들을 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마약성 진통제인 ‘모르핀’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벙커 트릴로지’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여인 모르가나 또한 랜슬롯과 아더, 그리고 가웨인에게 희망이자 마법이다.

너무나 어리고 순수했던 열세 명의 아이들이 전쟁에 참전하여 끔찍한 비극의 가운데에 선다는 현실은 우리에게 적잖은 아픔으로 다가온다. 어릴 적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동경해 서로를 원탁의 기사로 불렀던 아이들은 전장 속에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 버린다. 생존자인 가웨인과 랜슬롯, 아더, 그리고 아더를 기다리는 기네비어 부인. 하지만 그들은 전설 속 존재도, 위대한 기사도 아닌 단지 어리고 여린 병사였을 뿐이었다. 모르가나의 휘파람 소리를 따라 참호 밖으로 나간 가웨인은 결국 목숨을 잃었다. 홀로 남은 아더가 친구들의 이름을 외치는 장면에서 전쟁의 참혹함이 살결로 와 닿는다.





아가멤논: 작전명 아가멤논


‘아가멤논’ 에피소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희랍극 ‘아가멤논’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아가멤논은 전쟁의 선두에 선 장군이기도 했다. 본 에피소드에서는 아가멤논의 마지막, 즉 클리템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의 작전을 주로 다루며 전쟁이 파괴하는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를 여실히 보여준다.

크리스틴은 영국인이었지만 그의 남편은 독일군 장교 알베르트였다. 크리스틴은 알베르트의 아내이기 전에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전개했던 자주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질수록 영국과 독일 간 갈등이 깊어져만 가고, 크리스틴은 아이도, 사랑하는 남편도, 그리고 자신도 잃은 채로 피폐해져간다. 전쟁에 미쳐버린 알베르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부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총을 쏘고, 총을 쏴야 해서 사람을 죽였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집으로 돌아온 알베르트를 반긴 것은 크리스틴이 아니었다.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템네스트라였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아가멤논을 살해하고 자신을 되찾으러 집 밖으로 걸음을 내민다.

전쟁 속에서 여성이 도드라지기는 정말 쉽지 않다. 가부장제의 모순이 가장 잘 드러나는 비극이 바로 전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에서는 크리스틴이 단순히 전쟁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비련한 여인으로 등장하지 않고,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서사를 만들어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알베르트가 단순히 평면적인 악역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도 특징이다. 점점 망가져가는 알베르트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주제의식과 세련된 연출이 자아내는 화음이 가히 대단하다.





맥베스: 극중극과 현실이 합쳐지는 순간


이 에피소드의 특이한 점은 극중극 연출로 작품이 전개된다는 점이다. 관객들은 ‘벙커 트릴로지 – 맥베스’의 관객이자 참호 속 병사다. 다른 에피소드들과는 다르게, 관객들이 입장할 때 군번줄을 받는다. 극이 마무리되는 순간, 즉 극중극이 막을 내리는 순간 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천만 군인들을 위해 백 명의 관객들이 한 번에 군번줄을 짤랑인다.

이런 독특한 연출과 더불어 세계 1차 대전 속 맥베스 장군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꽤 큰 충격을 준다. “전쟁터에 장군은 없다”라는 명언을 외치던 그는 승진과 동시에 권력에 눈이 멀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맥베스는 결국 마녀들의 예언대로 맥더프 장군에게 패배하고, 그 대신 던컨 왕의 아들 맬컴이 왕좌에 오르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벙커 트릴로지 – 맥베스’에서도 극중극이 마무리된 순간에 부하들이 그를 총살한다.

벙커 트릴로지의 가장 큰 매력은 연출에 있다. 7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주제의식이 뚜렷하게 심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주제를 굉장히 세련된 방식으로 전달한다는 것이 큰 매력이다. 그리고 세 에피소드에서 여성 캐릭터가 절대 소모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자신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연출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천만 개의 삶, 천만 개의 진실.
참호 속 진실을 지켜 나갔을 천만 병사들을 생각하며, 묵념.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사진.jpg
 



[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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