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Episode 8.

온통 여담으로 이루어진 문구들을 늘어 놓는.
글 입력 2018.11.26 17:1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KakaoTalk_Image_2018-11-26-16-56-41.jpeg
 

사물들이 종말을 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저무는 날을 위협처럼 바라보면서 영화관의 어둠 속으로 도피하는 이들. 결말 없는 음악을 원하며, 곧잘 지난 시대의 작곡가들을 찾고, 시대에 뒤처진 모든 이들에게 귀기울이는 이들. (그저 그렇게 살리라는 희망 말고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 도착한 테르-뇌브의 사람들처럼.) 뒤엉킨 그물망처럼 온통 여담으로 이루어진 자신들의 문구들을 늘어 놓아 듣는 이로 하여금 지쳐 맥락을 놓치도록 하는 이들. 겨울이 되어 밤이 길어졌을 때, 또 여름이 저무는 해의 떨림에 매번 짧은 빛의 유예를 허락하는 시기, 북쪽을 찾는 이들. 손때 묻은 낡은 피아노의 녹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들. (글렌굴드, 피아노 솔로 중)


“뒤엉킨 그물망처럼 온통 여담으로 이루어진 자신들의 문구들을 늘어 놓아 듣는 이로 하여금 지쳐 맥락을 놓치도록 하는 이들” 사람을 사랑하지만 실수를 거듭하는 사람은 자신의 위대함 없음에 서글퍼진다. 사랑하는 일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위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쉽고 당연한 게 없다. 필연적으로 어떤 결핍을 이해하며 산다. 해명할 일이 많다. 엄마, 언니, 동생, 애인과 친구. 그들을 생각하다보면 가끔은 기쁘고 가끔은 슬프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꾸준히 해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날마다의 위대할 것 없는 이야기, 그 덕분에 우리가 서로에게 빌려준 보편의 감각, 그리고 그로인한 보통의 날들이 전부다. 보통의 날들을 엮어 갈무리한다.


재잘대기를 좋아하는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사람을 붙잡고 한 마디가 아쉬워 말을 보태기 일쑤며 같은 이야기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되풀이하는 일도 빈번하다.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는 그들 덕분에 이야기가 있다는 게 행복해 미칠 지경이곤 한다. 말문을 여는 찰나, 나의 청자가 ‘잠시만, 이건 맥주 한 잔 하면서 해야하는 이야기야!’라고 하면 그에게 미친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평생 당신만을 기다려 왔노라고. 나는 너의 사소한 이야기들을 듣는 일도 역시나, 무척 사랑한다. 네가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고민하거나 공부를 하러 어느 카페에 갈까 고심하고 재밌는 걸 보았다며 두서 없이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걸 사랑한다. 우리가 떨어져 있는 때문에 영영 알 수 없는 것들이 사소하게 전해지며 우리 둘의 보통의 것이 된다는 게 놀랍다. 하지만 위대함이 없는 사람은 이야기를 하는 일도 역시 마냥 쉬운 일은 아니기에, 말을 많이 한 날에는 꼭 죄를 지은 기분이 됐다. 오늘 너무 많은 말을 했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지었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단정한 얼굴 뒷편에 어떤 마음이 숨어 있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늘어놓는 말들에 묻혀 차마 꺼내지지 못한 그의 사정에게 큰 실수를 했다는 느낌 때문에.


평생이 되도록 별 일 아닌 것들을 말하고, 맞장구를 쳐주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새벽에 택시를 타고 서로를 찾아가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졸음을 참고, 때론 사소한 이야기를 위해 할 일을 온통 제쳐둘 수 있을까. 너의 여담, 나의 여담. 그러니까 우리의 메인 플롯은 아니어도, 간간한 재미가 있는 서브 플롯쯤은 얼마든지 나누며 지낼 수 있을까. 아주 힘든 때에도 듣는 일을 저버리지 않고, 말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며, 별 볼 일 없음에 마음 상하지 않으며, 두서 없는 여담들을 늘어놓고 싶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가끔은 우리, 부재중 전화를 보고도 다시 전화를 걸지 않기 때문에. 쉽게 보잘 것 없어지고 불안을 감지한다. 뒤엉킨 우리의 여담들이 당신이 맥락을 놓치는 줄 알면서도 여전히 뒤엉킨 채로 얽히고 설켜 너와 나 사이를 간신히, 혹은 끈질기에 이어주기를 영원히 바란다. 우리는 결국 결말 없는 음악을 듣고 피아노의 녹을 오래 기억하며 어떤 종말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굴드는 단지 이들 가운데 하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 가운데 지체하며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영화관을 나와 어스름 속으로 달아나는 것 같다. 영락한 몸을 숨기고 싶어하며, 그렇게 슬그머니 빠져 나와 노쇠의 벗이 되지 않은 걸 기뻐하면서. 예전에도 전등마다 불이 들어오기 전에 공연에서 자리를 뜨기를 몹시 원했던 저녁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슬그머니 빠져 나왔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에 잠긴 꿈꾸는 눈 깊숙이, 의사들에겐 분명 상심한 미소로 보이는 그런 미소를 띠고서.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


여담에 불과하다.



* Jian Chongmin의 그림입니다.



[양나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