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무너진 대학공동체와 지금 여기 철학함에 대하여 [문화 전반]

공정과 신뢰의 싸움
글 입력 2018.11.21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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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막말, 권위주의 논란에 대한 반박 대자보 -


언제나 불안하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은 계속해서 피어오른다. 하이데거가 언명하였듯 현대는 존재가 존재자로부터 떠나버려 인간들이 느끼는 근본기분은 불안과 경악이 되었다. 살아오면서 최선의 선택이라 여겼던 것들은 돌이켜보니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았고 이 길이 내 길인가 싶은 것들도 목적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그렇게 내 길이 되어버렸다. 제 3회 아트인사이트를 참여한 뒤 계속하여 떠나지 않는 생각은 많은 것이 정립되었다는 나를 계속해서 흔들고 있다. “나에게 ‘아트인사이트’는 어떤 의미이며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문화애호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에디터 활동이 끝나고 이주에 한 번 글을 쓰는 문화리뷰단 활동의 포문을 엶에 앞서 나는 어느 지점에 수렴하였고 이제 다시 어느 것들을 길러내야 하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매주 한 개의 글을 써내야했던 과거와 달리 격주로 글을 쓰는 것은 보류된 한 주의 시간만큼 부디 게으르지 않게 더 많은 생각을 담아내길 바란다. 삶의 지평이 예술이고 예술은 곧 삶의 지평이 되었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니체의 말을 빌려오는 것이나 이는 나 스스로 흔들리지 않기 위해 계속하여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는 것이며 진로의 고민으로 인해 흔들리는 나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려는 노력이다. 여러 예술들의 특성을 설명하며 삶에 살을 붙이는 것과 더불어 시사와 연결된 지점으로 사회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화두를 던지는 것은 이 땅에서 철학을 하는 이유가 되었고 이것은 계속해서 선택을 강요 받는 삶에서 어떤 방향성을 띠어야 하는지 결정토록 한다. 철학과 예술의 상보적 관계를 설명함과 더불어 그것이 현재 대학에서 공동체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철학은 크게 두 가지의 조류로 말하여진다. 하나는 황혼녘에 날개를 피는 ‘미네르바의 올빼미’라는 헤겔의 『법철학』 비유처럼 시대 정신을 자신에 담아내는 것이다. 근대 주체적 사유의 결정형이라는 헤겔의 관념론과 더불어 과학을 자신의 사유모델로 삼는 현대분석철학은 이러한 지점에서 동일한 형태를 띤다. 다른 하나는 니체의 모습처럼 시대에 맞서는 반시대적 고찰이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에서 나오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리며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라고 외치는 광인의 이야기는 신을 죽임으로써 자초한 위기를 자각하지 못하는 대중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종교, 도덕, 학문이 인간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위에서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 본 니체는 즉 인간의 본래적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시대에 당당히 맞서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신은 단순 종교적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가치를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며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언명은 이러한 가치의 부재와 더불어 파편화되고 개인주의로 머무르는 사회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절대적이고 교조적인 의미로서 존재하는 가치는 의미를 상실하며 다양성과 포용을 의미하는 타자와 감성의 영역이 확대됨도 파악할 수 있다. 계량적 과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말이 익숙하지도 않고 와닿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삶과 객관성의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영역이며 기존의 것에 대한 답이 아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보편화되지 않은 영역을 새롭게 그리고 재구성하여 의미망을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문학과 철학은 엄밀하지도 않고 실증적이지도 않다는 비판을 받으나 이는 그들이 사용하는 통약불가능성과 논의가 닿는다. 즉 그들의 언어와 논리로는 철학의 팔다리를 분절하여 무의미한 것으로 규정지으며 정복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에서 이상국가와 사회에 대한 사유는 현실적 대안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로부터 나왔고 이는 처절하고 뼈저린 고통의 현실감각으로부터 나왔다. 인간을 외부로부터 움직이는 자동기계 따위가 아니라 자율적 주체로 만들려는 초월적 의지는 치열한 반성으로 인간이 이루어낸 문화에서 진일보하는 모습을 보여왔으며 일상적 이해와 기존의 지평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과학적 사고의 ‘구체성’이 아닌 선(先)이해이자 선학문이며 선논리적 영역을 다루기 때문이다. 철학은 또한 과학과 함께 발전하였기에 기존의 직선적, 실체적 과학관에서 현대 생물학과 양자역학, 상대성이론에 이르기까지 인식과 존재의 변화로 이를 통해 윤리와 세계관의 변화를 도모하였다.

네이버가 주관하는 강연<열린연단>에서 ‘시(인)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라는 주제로 진은영(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은 위와 같은 인문학적 상상력을 한껏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에너지와 도구로 변환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음과 더불어 시를 표현하고 제작하는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존재의 가능성을 열여주었다. 시작(詩作)은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탁월성의 위계만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개개인이 스스로 의미를 지니고 성숙한 주체로 서는 작업을 의미하며 보편자 아래 개별자를 놓는 사유를 추구하는 경향 속 정감과 느낌을 살릴 수 있는 건강한 삶의 모습을 제시한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이루어진 도시 아이들과 흙과 자연에서 커온 시골 아이들의 정감이 다를 수 밖에 없듯 시는 우리 사회에 상실되어버린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한다. ‘우리’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의 확장, ‘우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보내는 신뢰와 연대. 시뿐만 아니라 예술이 행하는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대두되는 점이다. 진은영 시인은 두 가지의 이유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시인은 이 사회의 별종이며 가장 마지막 청자라고. 이름 없는 것들과 이름 없는 사람들을 부르며 마지막까지 남아서 타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그녀가 인용한 프랑스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와 우리나라의 시인 김수영 모두 위와 같이 직접 민주주의와 해방으로서의 자유 그리고 온몸으로 밀고가는 삶의 태도를 역설한 사람들이다.

대학사회에서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음은 이제 익숙해진 말이다. 아니 한국사회는 다른 나라와 달리 가족으로서의 유대만 공고하고 가족 외의 타인에 대해서는 신뢰도가 낮은 집단임이 통계적으로도 체감적으로도 설명되었다. 신뢰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신뢰의 소멸은 곧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며 이는 공적 영역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사적 영역뿐이라는 것이 된다. 이는 곧 정치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과도 동일한 것으로 봐도 무방한 것이 된다. 존재하는 것은 개인만이 되며 우리 밖의 타인은 믿을 수도 받아들여서도 안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개개인만이 살아남은 이 곳에서 사회와 타자를 향해 보내는 신뢰와 연대는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개개인의 삶을 보전하기 어려워진 곳에서 타인에게 자신에게 손길을 기대하는 것조차 부끄럽고 무서운 일이 되어버린다. 혐오는 더러움과 회피의 대상이지만 이것은 또한 자신이 그것을 무서워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는 최근 학내 언론 ‘중대신문’을 통하여 경영학과 모 교수의 권위주의와 막말 논란에 대해서 다루었다. 그 교수는 익명을 통해 얻은 제보는 효력이 없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으므로 고소를 진행하겠다는 식의 발언을 통해 중대신문 학생 편집장으로부터 사과와 정정보도를 받아냈다. 더불어 교수협의회에 속해 있는 이 교수는 사실상 총장라인이 교수협의회를 흔들기 위한 방식으로 보도를 낸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의 글을 대자보로 작성해 학교에 붙여 총장과 중대신문 담당 교수의 사임과 사과를 요구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아니 사실만 조명되는 현 시점에서 진실이 사건을 뒤집을 효력이 있을까.

모 교수에 대한 논란은 그 수업을 들은 수강생으로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그 교수가 가진 힘으로 상황을 뒤집었고 학교 미디어센터 산하기관인 중대신문이 가진 언론의 힘은 유약함을 보여주었다. 학내에 남아있는 것은 정의인지 힘인지 분간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공적 영역의 신뢰 상실은 악화되었다. 대학 공동체를 말할 때 단순히 행사를 다 같이 진행하거나 여러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를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함과 그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공정을 담보할 수 있는 유능한 기관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이 갖고 있는 도덕 원리로서 비례와 보편의 원리를 들었다. 무임승차자를 처벌하고 속임수를 징벌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기회의 평등을 더 넓게 보는 시각으로 이미 이루어진 과정과 결과만의 고려가 아닌 과정 전의 불평등한 구조와 배경을 사유하며 평등을 중요시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두 축을 이룬다. 새는 좌익과 우익 두 개의 날개로 날 듯이 사람 또한 보편과 비례, 두 개의 다리로 서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뢰와 공정이라는 두 축의 싸움은 옳고 그름의 싸움이 아니라 적합한 의견의 싸움이며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시사인> 기자 천관율의 언명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학 공동체가 무너져 악행이 이루어지는 것과 이것을 좌시하는 것은 의견의 싸움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영역으로, 제도 밖에서 횡행하는 불의를 제도 안으로 끌고 오려는 노력이 되어야 한다. 법을 악용하거나 인식의 변화를 따라올 오지 못해 담보할 수 없는 정의의 영역을, 선뜻 나를 희생하더라도 사회의 신뢰를 확립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아직 이 땅의 공동체와 민주주의를 위해 스러져 갔던 이름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김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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