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애매한 재능을 가진 당신에게 [문화 전반]

포기해도 괜찮아요
글 입력 2018.11.10 21:59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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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대부분 그렇듯 엄마의 치맛바람에 이끌려 여러 학원을 다녔었다. 높은 음자리표를 그릴 수 있게 해준 피아노 학원과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로 만들어 준 수학학원 그리고 주산학원, 그나마 흥미를 붙였던 미술학원까지. 몸을 쓰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단 걸 알았는지 엄마는 나를 발레학원까지 보내지는 않았다. 엄마의 선구안이 제법 맞았던 걸 23살에 성인 발레학원을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난 정말 몸을 쓰는 재능이 하나도 없었던 거다. 내 몸인데도 말이지. 생각과는 다르게 계속 삐걱대면서 어떻게든 따라 하겠다 애쓰는 모습을 거울로 보는데 어찌나 웃기던지. 다 커서 무용을 배우려 하니 힘든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틀린 말은 아니나 비단 발레뿐만 아니라 몸을 써야 하는 모든 것을 못했다. 학창시절에 체육시간이 제일 싫었던 이유도 피구를 할 때 제일 먼저 공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었을 정도로. 아주 몸치였다.
  
그런데 이런 나와 다르게 세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은 체육 특기자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 선수로 전국 대회에 나가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펜싱을 시작해 전국 소년체전와 같은 대회에서 상도 받았다. 집에 메달이 수두룩했고 펜싱으로 실업팀에 가냐 마냐 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전문 펜싱 선수가 되었냐고? 아니.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모든 운동을 접었다.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던 언니로서 펜싱에 재능이 있었는데 왜 그만두려는지 너무 아쉬워 동생을 붙들고 몇 날 며칠 설득을 하고는 했다. 그때 동생의 한마디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언니,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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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엄마의 손에 이끌려 다니던 학원들 중 미술학원은 등원을 손꼽아 기다리는 유일한 학원이었다. 피아노 학원은 건반을 치는데 자꾸 페달을 밟는다고 혼이 났었고 수학학원은 문제를 틀렸다고 혼이 났으니 그 어린 마음에 매일 칭찬만 해주던 미술학원의 선생님은 천사 같았다. 선생님의 칭찬에 힘입어 열심히 그려낸 종이를 팔랑거리며 집으로 입성하면 엄마는 집에 화가가 납셨다며 그렇게나 딸을 치켜세웠다. 형태가 뚜렷한 ‘사자와 해님’ 그림은 전국 대회에 입상했고 그 트로피를 받아 온 날, 엄마에게 이미 나는 화가였으리라. 워낙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내게 선생님과 엄마의 유난스러운 칭찬은 엄청난 미술 신동이라는 말로 다가왔고 훗날 미대에 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부모님의 이혼과 함께 아빠와 살게 되며 미술학원을 다니지 못했는데 그때에도 나는 막연히 미술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다 예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서히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기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초, 중학교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리기로 유명했던 내가 미술로 날고 긴다는 전국의 아이들 앞에선 명함도 내밀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좌절하며 3년이 지났고 홍대 앞 미술학원에서 보낸 미대 입시기간은 자괴감의 절정이었다. 늘지 않는 그림 실력에 절망하면서 나날이 발전하는 친구들의 그림에 열등감을 느끼고, 사실 내게 재능이란 없던 게 아닐까 우울해하곤 했다.

원하던 대학에 들어오고 새로운 복병을 만났는데 그건 바로 달라진 ‘미술’의 정의 때문이었다. ‘잘 그리면 장땡’이었던 그림은 ‘잘’ 그리는 게 아니라 예술적인 의미를 지녀야 했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감각을 터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지금까지 착각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미술 재능은 정말 애매했구나. 사실 나는 미술 천재도 아니었고 그나마 잘 그린다고 생각했던 그림조차 예술의 개념 앞에서 의미를 잃은 손재주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재능의 현실은 벌거벗겨진 채 명동거리를 활보하는 것만큼 수치스러웠고 그걸 인정하는 건 너무 힘이 들었다.
 
예술적으로 특별한 재능이 있다 믿고 노력해왔던 내게 누군가 “사실 그건 네 착각이야”라고 말했을 때의 충격이란.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대학교 3학년 때까지 부정했다. 아니야, 그 유명한 요셉 보이스와 앤디 워홀도 일상 속에 예술이 있고 모두가 예술가라고 했는걸. 조금 더 노력하면 될 거야. 그러다 4학년 졸업반이 되어 졸업전시를 준비하며 깨달았다. 아, 요셉 보이스와 앤디 워홀은 예술적 재능이 있었기에 그들이 한 말도 유명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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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런 고민을 동생에게 털어놓자 동생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 애는 이미 오래전 펜싱 칼을 쥐면서부터 자신의 재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운동에 있어 타고난 감각이 있는 친구를 넘어설 수 없던 자신의 한계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끼기도 했고 재능을 의심하며 자괴감에 빠졌던 적도 있다고.

그러나 동생이 말하길, 펜싱을 할 때 정공법만을 사용하면 이길 수 없다고 한다. 응용을 통해 유연함을 키워야 이길 수 있다고 말이다. 펜싱은 그만두었지만 응용하는 방법을 터득한 동생은 운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을 찾아 배우고 얼마 전 취직에 성공했다. 가진 재능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알 때 과감히 포기한 것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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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닌 재능에 대해 회의적이던 시기에는 포기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한계에 부딪히면 극복하고 넘어야 하고, 아프지만 청춘이기 때문에 참아야 하고, 재능이 없다면 노력으로 일궈내야 하고, 전공을 무조건 살려야만 하는 줄.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일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붙잡고만 있기엔 흘러가는 시간이 이제는 아깝게 느껴진다. 누구도 나의 미래를 책임져주지 않는데 ‘순응’, ‘타협’, ‘포기’라는 꼬리표가 무서워 붙들고 있는 것은 감정 소모만 할 뿐이지 않을까. 충분히 노력하고 고민한 뒤에도 아니다 싶다면 그건 정말 아닌 것이다. 애매한 재능으로 어디까지 달려왔대도 다시 출발선에 서기엔 늦지 않았다. 뭐, 물론 늦었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이미 많이 달려온 길에 멈춰 서서 잠깐 주위를 둘러보는 건 어떨까. 내게 남은 이 작은 재능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미 자신의 재능을 믿고 노력해온 사람이라면 걸어온 길에 흔적들이 남았을 테니 그 흔적들을 차근히 되짚어 보길.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미술작가의 꿈을 가지고 달려온 나는 이제 그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간다. 현실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어쩌면 타협한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굉장히 자존심 상하고 서글펐으나 붙잡고 있는다고 해서 나아질 것 같진 않았다. 특히나 예체능에 있어서는 타고난 감각을 넘어서기란 불가능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다. 살리에르가 죽어서도 모차르트에 가려져 있듯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애매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포기하세요!’라는 게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재능을 이길 수 없어 포기를 망설이는 모든 ‘지망생’에게 포기해도 괜찮고 타협해도 괜찮다는 심심한 위로이다. 꿈을 포기한다고 당신의 인생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지 않나, 당신이 현재를 보고 인정한 것부터 엄청난 성장이며 포기하고 타협하는 건 항상 나쁜 게 아니라고. 언제든 다른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과정 중 하나니까. 우리의 20대는 계속해서 인생의 방향을 찾는 여정 중이니 잠시 길을 헤맨 것뿐이니까.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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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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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김즌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0 0
    • 댓글 닫기댓글 (1)
  •  
  • 장재이
    • 2018.11.12 22: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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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즌저야말로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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