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내가 생각없이 내뱉은 무수한 말들은 어떤 온도를 지니고 있었을까.
글 입력 2018.10.2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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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없이 내뱉은 무수한 말들은
어떤 온도를 지니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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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고 제일 먼저 세운 목표가 '말을 예쁘게 하기'였다. 지난 해는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을 인지한 한 해였다. 올 해의 끝자락이 스물스물 다가오는 요즘 , 스스로를 점검해 본다. 올 한 해 나의 언어는 어떤 온도를 지니고 있었을까.



바빠서 못 한다는 말의 무게감.




일을 하는 과정에서 방법을 찾기 위해 분주한 경우가 있고, 핑계를 찾다보니 분주한 때도 있다. 오늘 하루, 나는 어떤 색깔의 분주함 때문에 "바쁘다"는 말을 쏟아냈을까.



나는 입버릇처럼 '하루는 왜 이렇게 짧은 걸까', '하루가 48시간이면 좋겠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는 평소에 24시간을 12시간처럼 쓰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늦잠을 자서 오전을 통으로 날려버릴 때는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하소연했고, 내가 계획을 잘못 세워서 불필요한 시간 소모가 많아질때도 되는일이 없다고 불평하기 일쑤였으니까.

'바빠서 못 해'라는 말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무게감이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은 대부분 스스로의 나태함을 부정하고자 하는 변명을 위해 사용된다.




우리에겐 슬퍼할 권리가 있다.




우린 종종 슬픔에 무릎을 꿇는다. 그건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잠시 고개를 조아려 내 슬픔을, 내 감정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과정일터다. 그러니 섣불리, 어설프게 슬픔을 극복할 필요는 없다. 겨우 그것 때문에 슬퍼하느냐고, 고작 그런 일로 좌절하느냐고 누군가 흔들더라도, 너무 쉽게 슬픔의 길목에서 벗어나지 말자.



최근에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과 '비행운'을 차례로 읽었다. '바깥은 여름'을 읽을 때 '아.. 이렇게 우울한 책이 다 있구나...' 했는데 '비행운'을 읽고 있자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주인공 하나하나가 세상 끝자락에서 간신히 한 발로 버티고 있는 곡예사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만큼 우울하면서도 묘하게 자꾸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기꺼이 그 우울함에 빠져들게 했다. 그 때 내가 우울함이 절정이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가끔씩 세상에 나 혼자 놓여진 것 같이 우울할 때가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우울함을 충분히 다독여주지 못해서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곤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 마음을 충분히 다독여 주지 않은 채 애써 자신의 상실감을 부정한다. 감정을 부정하려 기쁜 척 하거나 더 바쁘게 살면서 잊으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우울함을 온 몸으로 느끼는 편이 더 좋다. 우울한 노래를 듣고, 우울한 책을 읽고, 내 우울한 감정을 노트에 끄적여보고, 혼잣말이던 누군가를 향한 투정 어린 말이건 우울함을 꺼내놓는 것이 좋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다가 마음의 병이 커지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이왕 중독될 거 제대로 미치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게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그런 걸 하나쯤 가슴에 품고 있다면 이미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중독'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물론 뉴스에서 접하는 불법적인 것을 향한 중독을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나는 무언가에 빠져있는 내 모습을 참 좋아한다. 그리고 무언가에 정신 없이 홀려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한다. 남들이 보기엔 정상적인 루트를 벗어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그로 인해 행복하면 그만인게 아닐까?

어떤 것이든 내가 원해서 열렬히 행했던 것들은 일말의 후회도 남기지 않는다. 스무살 때 했던 첫 연애가 그랬고, 학기 중 갑자기 짐을 싸들고 떠났던 여행이 그랬고, 한 달 용돈의 절반을 쏟아가며 책을 사들일 때 그랬다. 무엇인가에 미쳐있을 땐 정말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만큼 행복해진다. 자연히 자존감도 높아질 수 밖에 없다. 그게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고,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미쳐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우리는 왜 궁금해 하지 않는가.




질문 있나요?



원래 그렇다는 표현에 익숙한 우리는 질문에도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수업 시간만 해도 그렇다. 선생님 마저도 질문을 독려하지 않는다. 질문도 안 했는데 답을 먼저 가르쳐준다. 그래서 답만 열심히 외운다. 어쩌다 "궁금한 것이 있나요?" 하고 질문을 받으면 선생님의 시선을 외면하기 바쁘다.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문화가 외부로 향하는 건 그렇다 치자. 문제는 그런 태도가 내부로 향할 때다.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선택지는 크게 두가지인 듯 하다. 순응 아니면 체념이다.


나에겐 인생의 모토가 되는 말이 있다. '살아지는대로 살지 말고, 살고 싶은대로 살자'는 모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의문점도 없고, 딱히 변화시키고 싶은 것도 없고, 그저 물 흐르듯이 조용히 하루하루가 지나가길 바라는 사람이 되기는 싫었다. 나에겐 무조건적인 성실함이 나를 성장하게 할 것이라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사람의 수동적인 목표는 금새 무너져버리고 만다. 내 인생이 무료하게 느껴지고, 그 동안 내가 원해서 성취한 게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리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살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나만이 정확히 알 수 있다.




언어의 온도에 대하여.



무심코 뱉은 한 마디의 말이 누군가에겐 비수가 되어 꽂힌다.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비속어 한 마디가 스스로의 품격을 격하시키기도 한다. 그 뿐인가. 다언은 실언의 지름길이 되었던 경험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올 한해도 두달 남짓 남은 지금, 생각없이 내뱉어지는 수많은 말들의 온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



[유다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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