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짝사랑에 대한 문장 [기타]

글 입력 2018.09.2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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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몰래 혼자 마음에 담아놓고 끙끙 앓으며 바라만 봤던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 사람은 내가 자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울적한 기분으로 '사랑에 상처받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듣는다. 1번 곡의 어쩔 수 없는 이별을 한 남자의 이야기,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 다음 곡으로 넘긴다. 갑자기 떠나버린 남자 친구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여자의 이야기, 이것도 내 이야기가 아니다. 1번부터 20번까지. 어느 곡에도 혼자 사랑을 하다 상처받은 이를 위한 노래를 없다. 짝사랑의 노래는, 문장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짝사랑의 시작



'저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한 걸까?'라는 질문이 쏟아지는 순간이 있다.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해도 자꾸만 눈길이 가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 가운데서도 이상하게도 그 사람 목소리만 선명하게 내 귀에 들린다. 우연히 그 사람 옆자리에 앉게 되거나, 나란히 길을 걸을 때,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심장의 요동침이 가슴에서 목의 혈관을 타고 귓속까지 올라와 쿵쿵 거리는 순간. 나는 집으로 돌아가 이건 짝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단순한 호감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오래전 숨겨진 짝사랑의 문장과 영화를 꺼내본다. 그리고 내가 짝사랑의 시작 단계에 들어섰음을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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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월 이야기 (1998)


영화 '4월 이야기'는 고등학교 때 짝사랑하던 선배를 따라 도쿄 근교의 대학교로 우즈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도 눈치채지 못한 선배의 모습을 흘깃거리며 훔쳐본다. 혼자 하는 사랑의 가장 첫 단계에 느낄 수 있는 엄청난 설렘을 잔잔하게 느낄 수 있다. 우즈키는 자신의 짝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적이 안 좋은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기적이라고 하셨다. 어차피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난 그걸 사랑의 기적이라 부르고 싶다."


2) 바이올렛, 신경숙.



그러나 그 남자는 나가지 않고 그녀 몸속에서 함께 기울어진다. 기울어지면서 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아 그녀 뺨을 기타줄처럼 퉁긴다. 팅팅팅. 그녀 뺨이 그의 뜻대로 퉁겨진다. 깜짝 놀란 그녀는 의자 위에서 일어서다가 넘어진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듯 넘어진 의자를 잠깐 물끄러미 보더니, 냉장고 덮개 주머니 속을 뒤적거린다. 창틀과 냉장고 위에서 자라고 있던 허브 잎사귀들이 덮개 주머니 속을 뒤적거리는 그녀를 바라본다.


물이 범람하듯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의식 속으로 진입해버린 그 남자. 그 남자로 인해 허둥거리고 있는 그녀.


(165~6쪽.)





짝사랑의 중간



내 안에 물처럼 일렁이던 미묘한 감정의 물결이 지나고, 나의 짝사랑은 중간 단계를 향해 나아간다. 이제 슬프게도 조금씩 현실적인 생각을 한다. 나와 너는 이루어질 수 없겠구나. 너는 나의 존재도 모르고 있구나. 하루 종일 그 사람 생각을 하지만 그 사람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 내가 꿈꾸는 것들은 그저 꿈일 뿐이라는 사실. 가장 복잡한 이 중간 단계에서 나는 몇 안 되는 슬픈 짝사랑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다. 나와는 다른 사람을 홀로 사랑하며 마음 끓이는 이들의 노래를, 이야기를 보며 읽으며 나와 같은 마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는다.

나는 항상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지만, 야속하게도 그 사람과 함께 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를 금방 잊어버리고, 나는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그 사람을 생각했다. 나에 대한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기분. 나는 그 사람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한 기분. 그럼에도 가끔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어느 날은 슬픈 기분으로 점철되어 매일매일 몰래 흐느끼는 날이 이어졌다.



1) 환상통, 이희주.



나는 이 모든 것을 알았고 내가 그중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견뎠다. 나는 구석에 앉은 얌전한 학생. 손을 들어 주의를 환기하기보단 조용히 앉아 나를 들키길 희망했다. 그러나 기대는 배반되기 마련이고, 나에겐 방과 후 면담도, 하굣길의 우연한 만남도 없었다. 나는 속내를 숨긴 채 책상 위로 엎드리다가, 점점 너의 눈에서 멀어졌다. 복도에 늘어선 검은 머리 중 하나가 되었다.


(113쪽)




2) 그러니까..., 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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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오는 나의 마음에 어느샌가

분홍빛이 물들지만

구름이 오고 바람이 불어 흐려지면

한순간도 버텨내지 못할 거야

너의 마음과 너의 얼굴은

다시 봐도 너무나 눈부시지만

너의 두 손을 결국에

나는 머뭇하다 못 잡을 거야

난 최고 멍청이니까

한 침대 한 이불 단잠을 깬 너는 웃고

식탁에 마주 앉아 좋기도 하겠지만

커튼을 올리고 눈이 밝아지면

보게 될 거야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비 오는 퇴근길 우산 속의 너를 안고

저녁거릴 사 들고 좋기도 하겠지만

안개가 걷히고 눈이 밝아지면

보게 될 거야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노을이 드는 낡은 창가에

걸터앉아 네 얼굴을 생각했지

환한 얼굴의 나와는 다른 슬픈 표정

우리 둘은 이뤄지지 않을 거야

우리 둘은 행복하진 못할 거야





그리고 마지막



누군가 내게 왜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을 하지 않았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응답하라 1994의 11화 '짝사랑을 끝내는 단 한가지 방법', 그러니까 그건 고백이다. 고백을 한 뒤 짝사랑이 이뤄질 확률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확률을 가진 건 바로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확답을 얻는 것이다. 그 우울한 대답을 듣고 싶지 않으니까, 착각이라도 내 상상뿐이라도 그 사람과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싶으니까. 그 희망을 깨기 두렵다.

그냥 누군가 나와 같이 홀로 사랑을 하고 상처받은 이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별에 대한 이야기로 넘쳐나는 가운데 홀로 사랑한 이들의 아픔을 이야기한 몇 안 되는 노래와 영화, 책을 찾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때, 그리고 지금도 그런 것처럼. 짝사랑 전문가는 오늘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끙끙 앓으며 내가 만났던 문장을 되새기며 마음을 정리해본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에게'에 나오는 짝사랑 전문가 '라라 진'이 사랑을 쟁취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짝사랑의 끝에서 사랑을 이룰 수 있기를.



[김하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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