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야, 나랑 놀자 - 올가을은 검정치마로 담백하게 [음악]

글 입력 2018.09.0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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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한바탕 비가 왔다. 비가 그치고 서서히 풀리는 날씨를 보니 어느새 여름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대학교에서의 내 마지막 여름방학도 끝나간다. 길었던 해가 짧아지는 것이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한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저녁은 이어폰을 꽂고 버스를 타거나, 생각에 잠겨 이리저리 산책하기에 알맞은 온도가 된다. 따라서 여름날의 달콤한 휴일들은 거의 끝나가지만, 그만큼 검정치마의 ‘조휴일’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다.

검정치마의 음악에서 뉴욕의 인디 록 사운드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한국과 미국을 오갔던 조휴일의 성장배경에 있었다. 조휴일은 재미교포 출신으로, 현재는 1인조 밴드인 검정치마 또한 뉴욕에서 3인조 펑크 록밴드로 시작했다. 한국의 홍대 신을 동경하였던 그는 2007년 한국에 들어와 ‘쌈지사운드페스티벌’에 지원하였지만, 마지막 관문에서 탈락한다. 이후 미국에 돌아가 여러 지역을 돌며 만들어온 음악들로 2008년 11월에 첫 정규 음반인 [201]을 발매하였고, 이 음반으로 검정치마는 한국 인디 씬에서 정식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소속 레이블이었던 ‘루비살롱레코드’ 대표의 잘못과 불화로 인해 루비살롱과 결별하였다. 이후 새 소속사인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와 만나 이 앨범의 전곡을 리마스터링하고 3곡을 추가하여, 2010년 3월 리패키지 앨범인 [201(special edition)]을 발매하였다. 따라서 현재 음원사이트에서 검정치마의 데뷔앨범은 리패키지 앨범 버전으로만 만나볼 수 있다. 이후 검정치마는 정규 음반과 디지털 싱글 음원을 발매하며 조휴일만의 독보적인 사운드와 감성을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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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special edition)]의 앨범 아트
 

그는 사랑과 관계에 대해 굉장히 직설적인 화법으로 표현하지만, 그래서 듣는 이의 귀를 더욱 예민하게 파고든다. 그의 가사는 철학자의 책처럼 추상적이고 어렵진 않지만, 금방 단물이 빠지는 풍선껌처럼 씹고 쉽게 뱉어버리기엔 뭉근하다. 따라서 검정치마의 음악은 사랑을 시작할 때, 관계가 권태로울 때, 이별을 실감할 때 언제 들어도 좋다. 지금까지 발매된 그의 모든 곡이 좋은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할 수 있는 나에게는 몇 개만 꼽아서 소개하는 것이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의 온도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바다 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중략)
 
너와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해
또 다른 빙하기가 찾아오면 어떡해


데뷔 앨범인 [201]으로 검정치마는 2009년에 심사가 이루어졌던 2010년 한국대중음악상 5개 부문 후보에 올라 최다 노미네이트의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최우수 모던 록 음반’ 부문을 수상하였다. 위의 곡은 [201]의 수록곡인 ‘Antifreeze’이다. 누구든, 어떤 관계든 영원을 약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휴일 또한 새로운 빙하기가 찾아와서 ‘너와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하냐고 말한다. 하지만 얼지 않는 액체, 즉 부동액을 의미하는 이 노래의 제목처럼 우린 얼지 말자고 다짐한다. 너의 눈빛과 체온, 우리의 온도라면 감히 우리는 영원히 뜨거울 수 있다며 달콤하고도 당차게 고백한다. 그래서인지 이 노래는 들을 때마다 나 또한 이런 사랑을 할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샘솟는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는 작년 5월에 발매된 3집 앨범인 [TEAM BABY]의 3번 트랙인 ‘Diamond’와 타이틀곡인 ‘나랑 아니면’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음원에 비해 아쉬운 라이브이지만, 귀엽고 당돌한 그의 웃음을 볼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건 다이아몬드하고
널 사랑하는 나 밖에는 없다고


나랑 아니면 누구랑 사랑할 수 있겠니
아마도 우린 오래 아주 오래 함께할 거야


특히 ‘나랑 아니면’의 단순하고 호기 넘치는 가사는 조휴일의 맥없는 목소리와 나른한 스트링 사운드와 어우러져 기묘하게도 관계의 안정감을 전달한다. 마치 일요일 오후에 느지막이 잠에서 깼을 때 옆에서 자고 있는 애인의 숨소리처럼 따뜻한 곡이다.


 
관계의 수축, 낙타의 속도


검정치마는 2011년 정규 2집 앨범인 [Don’t You Worry Baby(I’m Only Swimming)]을 발매하였다. 앨범 아트와 1번 트랙인 ‘이별노래’의 도입부의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상징하듯이, 이 음반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태평양 그 어디쯤에 헤엄치는 조휴일의 모습이 연상된다. 음악 평론가 배순탁은 이를 ‘긴급한 조난의 메시지’와 ‘난파의 이미지’라고 보았다. 하지만 나는 수록곡 ‘날씨’의 가사를 보며, 관계의 수면 아래서 열심히 헤엄치는 그의 가냘픈 다리를 모른 척 해주고 싶어졌다.


나는 날씨얘기 하나만으로 충분하고
쉽게 편안할 수 있는
그런 사이를 원했는데
마주 앉은 거리는 좁힐 수가 없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그대 고른 숨을 들으며 행복했고
아마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그대 숨을 가쁘게 하고


포크 록 사운드를 담은 ‘날씨’의 가사를 보자마자 최근 재밌게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17번째 테마인 ‘수축’이 떠올랐다. 이 책의 주인공은 연인 클로이와 함께 맞은 아침에서 사랑이 죽어간다는 기호들을 읽는다. 그는 연인과 그간 쌓아왔던 ‘라이트모티프’(알랭 드 보통은 연인 사이에서만 공유할 수 있는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을 이렇게 불렀다.), 즉 친밀성의 언어가 무너져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 언어에 연루되었음을 부인하는 외국인인 척 했다.’는 구절이 인상 깊었다. 권태기의 커플들이 흔히 겪는,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던 대화가 이상하게 어색하거나 혹은 뼈가 있는 느낌. 이전에 클로이는 주인공과 그의 직장 동료 윌이 만난 자리에서 윌의 감각을 칭찬하고, 윌에게 매력을 느낀다. ‘날씨’의 가사와 정말 꼭 맞는 스토리였다. 결국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 책에서 클로이와 윌은 사랑에 빠진다.


오 젊은 사랑 그것은
너무도 잔인한 것
어린 맘에 몸을 실었던
내가 더 잔인한가
모든 게 잘못 돼서 죽어 버릴 듯
위태롭던 우리 일 년은
눈물과 거짓말이 배어나오던
수많은 상처들만 남겼다
 
오 흉터도 하나 없이
깨끗이 아물어 버린 그 곳
우리 추억을 집어 삼켰던
예전엔 내입이 있던 곳
이제는 말해줘도 괜찮을텐데
그 어려웠던 한 마디를
눈물과 거짓말이 배어나오던
수많은 상처들이 대신 말한다
 
젊은 피가 젊은 사랑을 후회 할 수가 있나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언젠가는 나도 누구의 버림을 받겠지
그래도 나는 아무 상관없는 걸
 
오 그때는 몰랐었네
내가 왜 그랬는지
아주 오래전의 일들이
날 많이 괴롭혔던가
나 역시 흘린 피가 젊었을텐데
이젠 나도 그녀와 닮았네
눈물과 거짓말이 배어나오던
수많은 상처들은 벌써 잊었다
 
정말로 나는 아무 상관없는 걸
될 대로 되고 망해도 좋은걸
내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은
나 나 나 나 나 나

 
알랭 드 보통은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으로 23번째 테마의 시작을 연다. 사랑과 이별을 겪은 후 인간의 영혼은, 눈물과 거짓말에 젖어 물 먹은 솜처럼 불어난 몸을 이끌고 오느라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한다. 검정치마의 노래에서는 ‘젊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죽음은, 영혼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젊음도, 젊은 사랑도 이제 와 어쩔 수 없다. 사막의 바람은 낙타의 짐을 모래 속에 묻어버리고, 가벼워진 낙타는 속도를 내어 현실과 발 맞춰 걸을 수 있게 된다. 뮤직비디오에서는 아기자기한 색감과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색다른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절절한 기다림

  

자기야 나는 너를 매일
다른 이유로 더 사랑했었고
이젠 한시 오분 멈춰 있는
시계처럼 너 하나만 봐
네가 없는 날은 어떻게든
흘러가기만 기다려
투명해진 누가 날 볼 수 있을까

 
2017년 발매된 3집 정규 음반인 [TEAM BABY]는 6년 만의 정규 음반이자, 검정치마가 2016년 하이그라운드 레이블로 영입된 뒤 발표한 첫 음반이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검정치마는 디지털 싱글과 드라마 OST로 팬들의 애를 타게 했다. 그러나 그동안 조휴일이 만든 30개의 곡을 세 번에 걸쳐 발표할 것이고, 이번이 그 서막이라는 소식은 팬들을 기대에 부풀게 했다. 쉬는 날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조휴일에게, 팬들은 드디어 일했다며 감동했다. 그는 이번 앨범에서 더욱 솔직한 가사로 사랑을 노래했다.

이 앨범의 타이틀인 ‘나랑 아니면’은 말할 필요 없이 좋다. 세상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을 만난다면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이다. 그리고 나는 같은 사랑을 다르게 고백하는 ‘한시 오분’이라는 곡에도 마음이 갔다. 8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레게 리듬을 담고 있는 곡이다. 가사처럼 매일 연인을 사랑하는 다른 이유를 발견했다면, 그 사랑은 아주 강한 의지를 갖고 있을 것이다. 연인의 본성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나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지고 상대의 존재는 더욱 선명해진다. 결국 상대가 나를 봐주지 않으면 나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기다림은 깊은 사랑에 빠진 이라면 숙명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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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AM BABY]의 앨범 아트


사실 난 지금 기다린 만큼 더
기다릴 수 있지만
왠지 난 지금 이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일 것 같아


드라마 ‘또 오해영’의 OST로 삽입되었던 ‘기다린 만큼, 더’라는 곡도 또 다른 절절한 기다림을 노래한다. 드라마 자체에 큰 애정을 가지고 봤던 나로서는 OST 하나도 허투루 대할 수가 없었다. 검정치마의 곡은 더욱이. 이 곡은 드라마와 잘 어우러지며 드라마에서 OST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해냈지만, 곡 자체만으로 충분히 좋은 곡이다. 검정치마의 앨범에 실렸더라도 많은 팬들의 귀를 사로잡는 트랙이 되었을 것이다.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시작하여 쓸쓸한 조휴일의 목소리에 스트링 선율이 더해진다. 더 이상 내게 응답하지 않는 변해버린 사랑에게, 마지막인 걸 알면서도 기꺼이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곡이다. 이 노래는 듣고 있으면 ‘발에 채일 때까지 사랑하겠다’는 드라마 주인공 오해영의 대사가 떠오른다. 나 또한 있지도 않은 가짜 기억이 떠오를 만큼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꼭 들어보길 바란다. 사랑을 하고 있든, 이미 끝났든 관계없이 들으면 틀림없이 슬퍼질 것이다.
 
돌체앤가바나, 캘빈클라인, 톰포드와 같은 유명 브랜드는 2018 FW 패션쇼에서 호피나 레오파드와 같은 강렬한 애니멀 프린트를 선보였다. 센 언니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무늬의 스커트와 코트는 쇼장의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매 시즌 트렌드라는 패션에는 마음이 가지 않는다. 내가 입고 싶지가 않은걸. 그래서 주제넘게 그대들의 플레이리스트에도 간섭하려 한다. 올가을엔 검정치마로 담백하게 감성을 코디해보자.


[최희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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